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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글쓰기의 기쁨과 말하기의 고통

과정의 미숙함 드러나는 '말'보다

준비할 여유 있는 '글'이 좋았지만

자기표현 위한 소통의 도구일뿐

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어

정여울 작가




보여주기를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더 화려하게 자신을 장식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성적인 사람이나 예민한 사람보다는 적극적인 자기표현을 스스럼없이 해내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나는 그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아이, ‘발표’나 ‘리더’ 같은 단어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아이였다. 내가 글쓰기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는 ‘되도록이면 말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것은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할 때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원래 말하려던 바와 전혀 다른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싫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 과정의 미숙함이 다 드러나는 ‘말’보다는, 어느 정도 드러내되 결정적인 것은 숨길 수도 있는 ‘글’이 편했다. ‘말실수’라는 단어는 있어도 ‘글실수’라는 단어는 없지 않은가. 글에는 퇴고라는 멋진 패자부활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때그때 준비할 수 없는 말, 너무도 즉흥적이어서 예행연습 따위는 통하지 않는 말에 비해, 글에는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 매만지고 다듬고, 찢어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요컨대 글에는 백스테이지가 있었다. 무대 뒤편에서 나는 내 글쓰기의 예행연습을 할 수 있었다. 수십 번을 고쳐도 아무도 모르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너무 많은 자기표현을 요구하는 사회’와의 타협점을 찾았다. 자기표현을 하되, 반드시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일 필요는 없는, 차라리 소극적이고 예민한 내 성격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내면의 글쓰기가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글을 쓰다 보니 자꾸만 말할 기회가 생겼다. 글을 쓸 때마다 말할 기회는 늘어났다. 책을 쓰면 강연을 하게 되고, 책에 대한 인터뷰 요청도 많아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글을 쓰는 날에는 내 감정을 다 불태운 뒤의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강연이나 인터뷰 등의 ‘말’에 온 신경을 쏟은 날은 심각한 우울감과 공허감이 찾아왔다. ‘이러려고 글을 쓴 게 아닌데, 난 정말 말을 잘 못하는데, 글만 쓰며 살아갈 순 없을까’라는 식으로 자기변명을 하다 보니 더 큰 자존감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러다가 글도 못 쓰는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때 문득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표현의 욕구가 없을까. 우리는, 그러니까 내성적인 사람들은 표현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르게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라는. 말하기를 피하고 무서워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내 안의 두려움과 싸워나가기 시작했다. ‘진심을 다해 내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겠지’하는 믿음이 생겼다. 글쓰기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했지만, 말하기는 ‘나와 청중간의 교감’이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더욱 복잡한 소통의 장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말하기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독자를 대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혼자만의 글쓰기에 매진하는 ‘문자언어’와 달리,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변화와 질문까지 만나볼 수 있는 말하기의 상호교감적인 소통의 매력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도 강의시간마다 긴장하긴 하지만, 가끔은 10년 전의 첫 강의 못지않은 공포감에 몸을 떨기도 하지만, 이제는 ‘말하기’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말하기를 글쓰기보다 좋아하진 않지만 오직 육성과 표정과 상대방의 교감 속에서만 작동하는 말하기의 역동적인 매력을 알면 알수록 글쓰기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

열심히 강의를 하다가 문득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글쓰기 노트에 메모를 하기도 하고, 글을 진득하게 쓰고 나면 왠지 ‘내가 공부한 내용을 누군가에게 말로 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했다. 나는 ‘글쓰기’는 좋아하고 ‘말하기’는 싫어한다고 믿었지만 사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글쓰기와 말하기는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서로 다른 실체일 뿐이라는 것을. 자기표현은 늘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하기와 글쓰기는 연결되어 있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때로는 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머나먼 타인의 마음’ 속으로 향하는 마음의 사다리에 훌쩍 올라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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