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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한 걸음 뒤 '86년생 박혜진'

구슬을 꿰어 진주로 만든 편집자

제목·결말부 조언하며 소설 완성도 높인 숨은 조력자

민음사 한국문학 편집자 박혜진 과장




출간 1년도 안 돼 40만부 고지가 코 앞이다. 올 들어 독자들의 선택을 가장 많이 받은 책.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일간지 정치면에서 먼저 주목받았고, 급기야 ‘신드롬’을 만들어냈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까지 제작됐다. 일본 소설에 밀리고, 짤막한 에세이에 뒤쳐지며 자존심이 한껏 상했던 한국소설로서는 모처럼의 쾌거다. 그것도 육아, 몰래카메라, 데이트폭력 등 여성 문제를 총망라한 페미니즘 소설이 이룬 성과니 그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 조 작가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도 대단했다. 그리고 딱 한 걸음 뒤, 작가의 그림자 속에서 웃고 있는 한 사람. 이 작품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민음사 한국문학 편집자(과장), 86년생 박혜진 씨다.

“보통 등단 작가들과 달리 조 작가의 원고는 민음사 투고 메일함에 담겨 있었어요. 지금도 그 원고를 놓쳤다면 어땠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

2일 서울 신사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박 과장은 ‘82년생 김지영’의 초고를 읽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박 과장은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무엇이 성차별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적확한 사례 표현으로 보여주는 지적 자극이 있었다”며 “책에서 다룬 문제가 개인의 경험이 아닌 사회의 경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따뜻한 시선으로 일깨워주는 정서가 아주 좋아 ’반드시 출간해야 할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2011년작 ‘귀를 기울이면’부터 따뜻한 시선과 냉철한 현실 인식이 돋보였던 조 작가를 눈 여겨 보고 있던 박 과장이지만 초고 단계에서는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우선 조 작가가 지은 가제는 ‘820401 김지영’이었다. 매주 쏟아지는 신간들 사이에서 표지와 제목만으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 잡는 데는 번뜩이는 제목이 필요했다. 박 과장은 일찌감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을 마음 속에 정해뒀다고 한다. 그 제목을 대신할 그 어떤 제목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회학 보고서 같은 독특한 형식의 글에 이만한 제목이 없다고 여겼던 탓이다.

“개인 김지영이 아니라 세대와 성별을 더 드러내 대표성을 갖도록 하고 싶었죠. 무엇보다 1980년대생 여성들의 특수한 상황과 1980년대생인데도 여전한 상황을 오버랩하고 싶었어요. 책이 출간되고 제목이 절묘했다는 평을 들을 때마다 뿌듯하더군요.”



소설 속에서 정신질환을 앓게 된 김지영을 치료하는 의사의 이야기가 결말부에 더해지도록 조언한 것 역시 박 과장이었다. 박 과장은 “보통의 작가들은 소설의 결말보다는 첫 장에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제2의 독서는 책을 덮으면서 시작된다”며 “김지영을 잘 이해하고 장악한듯 하지만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사를 통해 우리가 처한 현재를 좀 더 냉소적으로 보여주면 독자들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웃었다.

여기까진 책이 나오기 전의 일. 책이 나오고 나선 타깃 독자층을 찾아 발품을 팔았다. 맘카페나 북카페 등 온오프라인 읽기 모임을 찾아다니며 책을 알렸고 트레바리, 독세논업 등 북클럽에 순회도 다녔다. 남성 독자들에게 문턱을 낮추기 위해 남성 작가들의 리뷰를 받기도 했다. 출판사에선 8,000부, 대형서점 MD들 사이에선 2만부를 예상했던 책이 올 들어 금태섭 의원이 동료 의원들에게 선물하면서, 급기야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하면서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난 5월 10만부를 돌파한데 이어 9월초 30만부, 이제는 40만부 고지가 코 앞이다. 책의 가치를 알아본 신생 영화사에 판권이 팔렸고 연극으로도 제작된다.

박 과장은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에서 소외돼 있던 여성의 그림자 노동을 끄집어 내 공감대를 얻었던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은 알파걸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공감의 크기를 키웠다”며 “특히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있던 남성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남성 독자들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과장은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당시 김엄지 작가의 소설의 편집자로서 틈틈이 비평을 쌓았고 글을 모으고 다듬어 출품했던 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박 과장은 열심히 읽고 쓴다. 온라인에서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글을 쓰고 팟캐스트에도 자주 출몰한다.

“‘82년생 김지영’ 출간 후 문학이 어떤 문제의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공감하도록 하는 ‘확장성’이 크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 속에 잠복된 생각을 보여줄 형식을 찾아내지 못한 것일 뿐이죠. 새로운 언어가 발견되기만 하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문학 편집자이자 평론가로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는데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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