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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언론인 고미요지, 北 김정은을 말하다]<3>시간에 쫓긴 후계자...내정에서 발표까지 1년

흔들리는 후계 구상…세습 배제→집단지도체제→세습

세습에 반대한 김경희…가족회의서 박차고 나간 정은

경험도 실적도 없이 초고속 1인자로 등극

中 인민일보의 날카로운 세습 견제구…애증의 北中

전가의 보도가 된 ‘10·8’유훈…그리고 김정일 신격화

[日 언론인 고미요지, 北 김정은을 말하다]





세습밖에 길은 없다

김정일은 후계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2000년 전반에 일단 아들 후계를 생각했지만 자기 세대에 세습은 없다고 스스로 정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신중히 검토했다. 그런데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40일 만에 의식을 되찾고 생각한게 후계자 문제. 기적적으로 회생했지만 몸은 수척하고 언제 또 뇌졸중이 재발해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몸 상태가 차분해진 어느날 김정일은 여동생과 매제(김경희와 장성택)를 불러 후계자 결정 가족회의를 열었다. 복수의 탈북자에 따르면 그 내용은 이렇다. 김정일이 “김정은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꺼내자 김경희는 “분별력이 없는 아들에게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나”고 솔직한 말로 걱정했다. 함께 식사 중이던 정은은 고모의 말에 화가 나서 젓가락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다른 가족은 김정일의 결정에 따랐다.

이 가족회의를 계기로 정은으로 후계 세습작업이 본격화된다. 장성택은 2010년 김정일의 현지지도에 가장 많이 동행해 후계 실현을 위한 조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후계는 2008년 9~10월에 정식 결정됐다. 그해부터 김정일은 정은을 데리고 당 간부를 만나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의중을 내비쳤다.

최초로 김정은에게 맡겨진 일이 비밀경찰. 국가안전보위부 보고서 체크가 업무였다. 국가통치의 중핵인 보위부 활동을 파악시킬 요량으로 이 때가 2009년 1월부터다.

핸디캡의 젊은 녀석

후계는 내정돼 있었지만 김정일이 2011년 12월17일 급사해서 지도부가 큰 혼란에 빠졌다. 우선 김정은이 지도자 경험과 실적이 모자라고 무엇보다 어렸기 때문. 게다가 김정은은 김정일이 죽은 시점에 국가의 2인자로 활동한 적이 없었다.

이에 반해 김정일은 1974년 2월14일 김일성 후계자로 추대됐고 그로부터 6년 남짓 겉으로는 조심하면서도 후계자로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모습을 드러낸게 1980년 10월10일 6차 당대회. 여기서 김정일은 김일성이 갖고 있던 당중앙위정치국·당서기국·중앙군사위에 걸쳐 지위를 차지하며 2인자임을 내외에 알렸다.

이 당대회는 김정일을 주석으로 세우느냐도 거론됐으나 뚜껑을 열고 보니 그런 일은 없었다. 그것은 어느 신문 기사의 영향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직전에 게재된 인민일보 사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북한 당대회 개최 전 1980년 9월 18~19일에 걸쳐 중국의 사례를 들어가며 종신제와 지정후계자를 비판했다. ‘영수와 인민’이라는 제하의 기사였다.

종신제와 권력자에 의한 후계 결정은 “고대정치의 유물이며 정국안정보다 불안정하게 된다. 우리 국가는 사회주의국이다.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든다. 영수의 권한은 인민이 부여한 것으로 후계자 지정 권한은 없다”며 오류를 완곡하지만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에 앞서 게재된 ‘제3세계 지도자의 쫓기는 임무’ 논평은 “나라의 운명을 1인 또는 2인의 개인적 성망 위에 두는 것은 불건전하고 위험하다. 사건이 생기면 수습 불가능”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 망명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서기는 저서(‘김정일에게 선전포고’)에서 김정일이 중국에 대해 자본주의로 달려가며 민족이기주의를 지향한다고 비판했음을 밝혔다. 중국을 찾는 북한 주민들에게 개방도시 선전(深?)과 주하이(珠海)·만리장성 견학을 금지하는 등 강한 경계심을 품었다. 그러니 김정일에게 중국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김정일과 김정은의 세습 프로세스

1982년부터 김정일의 ‘노작’이라는 담화와 저작이 공개돼 많은 주민들이 읽었다. 정일은 국가주석이 갖고 있던 직위,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을 김일성에게서 넘겨받았다.(1991년12월24일 6기 당중앙위 19차 전원회의) 그리고 1993년 4월9일 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에서 국방위원장직을 차지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71세 되던 1983년부터 ‘김일성 대행’을 맡게 돼 부친이 사거(1994년 7월8일)하기 11년 전부터 부친의 일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정은은 후계자로 내정된지 1년밖에 안돼 2010년 9월28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발표되고 무대 위로 공식 데뷔했다. 이로부터 겨우 1년 뒤 2011년 12월17일에 부친이 급사하고 말았다.

추수가 끝나고 잔설마저 남아있는 북한의 가을 들녘에 최근 한반도 긴장고조를 반영하듯 스산함마저 감돈다.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총진군하자”는 선전판엔 김일성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제공=고미요지


아버지의 신격화

김정은은 ‘10.8유훈’(김정일이 2011년 10월8일에 남겼다는 유언)을 꺼내들어 인민군최고사령관이 됐다(2011.12.30 당중앙위 정치국회의). 이 유훈이 김정은의 정치 방향성을 정해놓았는데 “핵과 장거리 미사일, 생화학병기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보유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길임을 명심하라. 방심하지 마라”는 것이 요점이다.

그리고 자신이 정당한 후계자임을 호소하려 아버지 김정일의 신격화에 급히 착수했다. 김일성 탄생 100년(2012.4.15)에 아버지의 유체를 김일성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또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동상을 만경대에, 김일성 동상과 나란히 세우고 김정일이 태어난 2월16일을 광명성절로 제정한다”고 공표했다. 북한은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제정해(1997.7.8) 민족최대 명절로 삼고 있는데, 광명성절이 태양절과 함께 명절이 됐다.

/고계연기자 kogy2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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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최근 한반도 정세(외교 안보 등)를 좌지우지하는 핵심인물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라 하겠다.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그리고 섬뜩한 말 폭탄 주고받기로 긴장과 전쟁 위기감을 키우는 두 사람. 이제는 ‘선전포고 주장’까지 나오는 일촉즉발 험악한 형국이다.

트럼프에 맞서는, 30대 초반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미치광이인가? 전략가인가? 그의 성장 과정과 인성 등을 들여다보고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을 분석·예측해보는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도쿄신문 편집위원)의 원고를 입수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서교출판사 김정동 사장이 번역서 출간에 앞서 콘텐츠 사용에 대해 양해를 해줬다. 일부 수정을 거쳐 정기적으로 옮겨 싣는다.

* 고미 요지(五味 洋治)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쥬니치신문 서울지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총국에서 근무하며 북한 뉴스를 쫓아왔다. 올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으로 지난 2013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도쿄신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6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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