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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녹파잡기] 화려한 음주가무 뒤켠…어둡고 쓸쓸한 生의 이면

■한재락 지음, 신위 비평, 휴머니스트 펴냄

조선 후기 개성 한량이 쓴 '기방 르포'

名技 66명 '인터뷰' 비평과 함께 담겨

출사길 막혔던 저자의 애끓는 심정

다사다난한 기생 운명에 오롯이 투영





조선시대 기생(妓生)들은 풍류가객을 위해 술을 따르고 시를 지었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빼어난 외모와 예술적 소양을 겸비했음에도 비천한 사회계급 탓에 재능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기생’이라는 단어에 아름답고도 처연한 슬픔이 배어 있는 것은 이런 양면적인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개성 갑부의 후손인 한재락(생몰년 미상)이 지은 ‘녹파잡기’는 음주가무의 화려함과 쓸쓸한 생의 이면이 두루 공존하는 기방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당시 벼슬길을 포기한 사대부였던 한재락이 평양 기생 중에서도 용모와 재능이 가장 우수한 기생 66명과 기방을 기웃대는 명사 5인을 만난 뒤 그에 대한 소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집필 연도는 1829년 전후로 추정된다. 저자가 ‘취재 대상’을 평양으로 한정한 것은 조선 후기 평양만큼 뛰어난 기생들이 많은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목에 담긴 ‘녹파(綠波)’라는 단어도 평양의 대동강 물을 상징한다. 책에는 한재락이 쓴 글은 물론 신위의 비평과 한자로 된 원문 등이 함께 실렸다. 신위는 한재락이 오래 두고 사귄 벗으로 당대 최고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문인이었다.

조선 유일무이의 ‘기방 르포’라고 할 만한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치 한편의 정밀한 풍속화를 감상한 듯 그 시절 정경이 훤히 그려진다. 풍류의 기억을 더듬은 글답게 문체는 시종일관 경쾌하고 책갈피마다 웃음과 해학이 넘친다. 이 작품의 해학을 특히 돋우는 것은 한재락이 쓴 소(小)단락이 끝날 때마다 그 바로 아래에 촌철살인의 한두 문장으로 붙어 있는 신위(1769~1845)의 비평이다. 한재락은 녹파잡기를 완성하고 4년쯤 시간이 흐른 뒤 친구인 신위에게 단락별로 짧은 후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신윤복의 ‘유곽쟁웅’, 간송미술관 소장. / 사진제공=문화재청


예를 들면 저자가 오래 사귄 기생을 버리고 떠난 ‘평계’라는 인물의 연애사(史)를 기술하면 신위가 “평계 선생을 위해 완곡하게 옹호하려는 글쓰기가 많이 보인다”고 덧붙이는 식이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가난뱅이일지라도 마땅히 그를 섬길 거야”라는 기생의 대사를 보자마자 신위가 “어떻게 해야 그녀가 마음 속에 둔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한번 물어봐야지”라고 대꾸하는 대목은 배꼽을 잡게 만든다.

이처럼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으로 읽을 수 있는 저서지만 독자들은 책 곳곳에서 인생의 어둡고 쓸쓸한 그림자와 마주치기도 한다. 기생의 복잡다단한 운명과 마찬가지로 저자인 한재락 또한 개성 출신을 철저히 배척한 당시 사회 분위기 탓에 출중한 재능을 벼슬길에서는 꽃 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소양을 저잣거리의 주점에서 과시하며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 외에 한재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면서 세월이 저녁 풍경과 같다”고 슬퍼하는 기생의 모습에 자신을 오롯이 투영한다. 외설스런 말을 지껄이는 손님의 가락지를 깨부수고 준엄하게 꾸짖는 기생을 묘사하는 단락에서는 세상의 모든 차별에 저항하고 싶은 저자의 속마음이 은근슬쩍 드러나기도 한다.



국보 제135호 신윤복 풍속도 화첩 중 ‘연소답청’,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문화재청


역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지난 2006년 국내 최초로 ‘녹파잡기’의 존재를 알렸으나 온전한 내용의 원본을 구하지 못해 번역서 출간을 계속 미뤄 왔다. 그러다 올해 6월 서울의 한 고서점에서 매우 우수한 상태를 보유한 선본(善本)을 입수하면서 번역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안 교수는 “녹파잡기는 현대로 치자면 연예계 최고의 스타만을 골라 인터뷰한 책에 견줄 만하다”며 “분량이 많지 않은 소품서지만 내용은 조선시대 기생과 기방 문화를 살펴보는 데 독보적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1만5,0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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