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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오늘은 맑음] '경제민주화의 산실' 망원시장, 그뒤엔 그녀들의 땀과 눈물이…

■최현숙 외 9인 지음, 일곱번째숲 펴냄

대형마트와의 싸움서 '절반의 승리' 주도

시장 지켜낸 여성 상인 9명 인터뷰 기록

산업화·환란으로 깊어진 약자의 설움에

여성이란 이유로 희생당한 아픔도 담아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전경.


지난 2012년 초 서울 마포구의 망원시장 옆에 ‘홈플러스 합정점’이 곧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시장 상인들은 “골목상권이 초토화될 것”이라며 천막 농성에 돌입했다. 이에 홈플러스는 “합정점 개장을 위해 이미 1,000억원 이상을 투자한 만큼 개점 포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맞섰다. 1년이 넘는 지루한 공방 속에서도 물밑 협상을 포기하지 않은 양측은 마침내 극적으로 타협안을 도출했다. 홈플러스는 시장 상인들이 요구한 △홈플러스 합정점 16개 품목 판매 금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망원역점 폐쇄 등을 수용하기로 하고 2013년 6월 합정점을 개장했다. 전국 각지의 전통시장 상인들은 대기업과 재래시장의 대화를 통한 상생의 사례를 보며 망원시장에 ‘경제민주화의 산실’이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을 가득 메운 고객들.


‘오늘은 맑음’은 이처럼 생존의 끝자락에서 살아남아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망원시장의 여성상인 9명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할배의 탄생’의 저자로 유명한 최현숙 구술 생애사가 동료 작가 9인과 함께 상인들을 만났다. 모든 기록은 상인들의 생생한 구어(口語)로 서술돼 있으며 상인 1명의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저자들이 남긴 2~3쪽의 짤막한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

망원시장에서 ‘새나래수산’을 운영하는 배미경 상인.




상인들의 인터뷰가 챕터별로 이어지는 병렬적 구성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두 가지의 큰 흐름이 손에 잡힌다. 우선 거대 기업에 맞선 재래시장 상인들의 생존 분투기. 2012년 당시 상인들은 날마다 조를 구성해 망원역에서 서명 운동을 벌였고 시장에서는 ‘입점 철회’ 구호가 적힌 녹색 조끼를 한시도 벗지 않았다. 홈플러스 합정점이 들어선 이후에도 상인들은 고객을 뺏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를 악물고 ‘시장 살리기’에 나선 상인들은 전통시장 최초로 티머니 교통카드 결재 시스템을 도입했고 인건비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배송 서비스를 주저 없이 시작했다.

‘오늘은 맑음’의 또 다른 축은 상인들의 인생사다. 상인들이 털어놓는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듣노라면 산업화 시기와 외환위기를 관통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훤히 그려진다. 박정희 시대를 산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법한 반공 웅변대회에 얽힌 일화를 생생히 들려주는가 하면 1990년대 초반 일산 신도시 개발로 턱없이 낮은 보상금을 받고 쫓겨나야 했던 원주민들의 가슴 아픈 역사도 소개된다. 당시만 해도 뿌리 깊은 남녀차별 아래 남동생을 공부시키느라 어린 나이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상인의 이야기, 시집 간 딸이 손자가 아닌 손녀를 낳아 송구하다며 사돈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히는 친정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삼킨 일화 등 시대상을 요약하는 장면들 역시 쉼 없이 펼쳐진다.

망원시장에서 ‘종로연떡방’을 운영하는 황성연 상인.


저자들은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한 상인에 대한 인터뷰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첫 인터뷰를 하던 날은 19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일 때였다. 한 후보의 부인이 요즘 뜨는 망원시장을 찾아왔다는 소식에 카메라 플래시로 시장 초입이 소란스러웠던 그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사람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위대한 한 명의 정치인도 아니지 않을까. 그 시절 수많은 누나와 여동생과 언니들의 이야기가 조력자로 남지 않고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기록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물론 망원시장의 상인들 앞에 장밋빛 미래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망원시장 인근에 부지를 확보한 롯데가 복합쇼핑몰 건설을 위한 첫 삽을 조만간 뜰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맑음’을 함께 펴낸 저자와 상인들은 가슴속으로 조용히 되뇐다. 하나로 똘똘 뭉쳤던 2012년의 기억을 잊지 않는 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오늘도 햇볕이 쨍쨍 내리쬘 것이라고. 1만5,0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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