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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혁신 리더십, 그 닮음과 다름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





보름 전 세종 리더십을 배우자는 ‘후일지효(後日之效) 포럼’ 참석차 여주에 다녀왔다. 과학기술 혁신정책을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이 포럼의 지향점을 ‘훗날에 실효성이 드러날 정책을 연구해 펼치자’라는 의미로 새기고 싶다. 연구 착수에서 성과 창출에 이르는 회임 기간이 긴 과학기술이 세종 치세에 부흥한 까닭이기도 하다. 여주에는 두 개의 영릉이 있다. 세종이 묻혀 있는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다. 그 사이를 잇는 길이 ‘왕의 숲길’로 이름 붙여져 이목을 끈다. 정조가 400년 전의 할아버지 세종을 만나러 사색에 잠겨 걷던 길이다.

조선 초기와 후기를 각각 대표하는 성군으로서 세종과 정조는 여러모로 닮았다.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세종의 집현전과 정조의 규장각이 대표적인 닮음의 상징이다. 세종이 갑인자를 주조해 많은 책을 간행했듯 정조도 즉위 1년 반 만에 정유자를 만들었다. 이후의 행보에서도 세종처럼 되고 싶었던 ‘세종 키즈’ 정조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두 왕의 혁신 행태와 방식은 사뭇 달랐다. 세종은 부왕 태종이 개혁의 걸림돌을 모두 제거해 정치적으로 안정된 여건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정조는 격심한 붕당정치의 대립과 정쟁 속에 즉위했다.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회의 방식을 택했으나 정조는 신하를 가르치려 들며 자신의 주관대로 회의를 이끌었다. 세종은 재임기간 동안 1,898회의 경연(經筵)을 했으나 정조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도입해 신하들을 손수 재교육했다.

이를 두고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 연구가인 박현모 교수는 “세종이 ‘뒤에서 미는’ 방식의 지도력을 발휘했다면 정조는 ‘앞에서 끄는’ 방식의 지도자”라는 말로 정리한다. 세종은 안정적 수성형이요, 정조는 모험적 개혁형 군주였던 것이다. 창업에 힘쓴 왕에게 조(祖)를, 수성에 역점을 둔 왕에게 종(宗)을 붙이는 추존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은 미국이 독립선언을 했으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판돼 자본주의의 싹이 움트던 해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제1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산업과 경제를 넘어 정치구조와 사회의식까지 바꿔 나가던 시기에 이 땅에서는 붕당 대립과 세도정치로 출중한 인재들이 뜻을 펴지 못한 채 스러져갔다. 정조 치세가 10년만 더 길었더라면 혹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없었더라면 조선도 정치개혁과 산업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 정조의 실용주의 노선과 북학파 학자들의 혁신 역량이 환상적인 결합을 이뤘다면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에 속절없이 무너진 역사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얼음판을 걷는 심경으로 혁신의 길을 가면서 처절하게 외로웠던 왕 정조. 가끔은 개혁이라는 중압감에 자기통제력을 잃기도 하고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그가 신봉한 통치 철학은 ‘군주민수(君舟民水)’의 격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책이 민심을 거스르면 훗날의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정조의 ‘경장대고(更張大誥)’에 세종의 ‘후일지효’가 어우러진 책략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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