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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49>강세황 '영대빙희도']하얀 얼음호수 위서 활쏘기...담백하게 담아낸 老화가

230년전 72세에 사신으로 중국 연행

희미한 격자 선으로 얼음 결도 표현

詩書畵에 능통한 조선 후기 문인화가

깔끔하면서 도전·실험적인 그림 추구

'향원익청''영통동구도' 등 명작 남겨

‘영대기관첩’ 중 강세황이 그린 ‘영대빙희’는 훈련의 일환으로 빙판 위에서 활쏘기 재주를 겨루는 중국 군사를 소재로 삼았다. 종이에 수묵화, 23.3x13.7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전 인류의 축제인 2018평창동계올림픽의 개막을 알리는 성화가 백자 달항아리 모양의 성화대에 안착했다.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에서는 고대 올림픽 경기의 생생한 모습, 월계관을 쓰는 우승자의 영광이 채색 도자기에 새겨져 전한다. 하지만 이번에 성화대로 사용된 백자의 시대 조선은 올림픽과 거리가 먼 나라였다. 하물며 동계올림픽 종목인 설상, 빙상 경기는 오죽했겠나. 조선 시대에 그린, 얼음판 위에서 재주와 재능을 겨루는 장면을 찾자 하니 이 그림이 거의 유일하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의 ‘영대빙희’다.

그림 가운데로 펼쳐진 여백은 거대한 아이스링크다. 한국은 아니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 외곽에 위치한 태액지(太液池)라는 호수다. 지금은 북해공원이 조성돼있는 곳이다. 이 호수 주변은 예부터 황제의 공간이었고 영대(瀛臺)라 불렸다. 그림 왼쪽으로 저쪽 섬과 이쪽 땅을 연결해 주는 다리가 구불구불 걸쳐 있다. 진짜 호수다. 사람들이 풍덩 빠지지 않고 서서 돌아다니는 것은 강추위로 얼음이 꽝꽝 얼었기 때문이다. 화가는 희끄무레한 격자의 선으로 얼음이 얼어붙은 결을 표현했다. 빙희는 얼음 빙(氷)에 놀 희(戱) 자를 쓴 것이니 영대빙희는 영대 호수의 얼음 위에서 펼쳐지는 묘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펼치는 묘기란 어떤 것인가. 활쏘기다. 그림 속 인물들은 국가대표 빙상선수가 아니라 군인들이다. 그림 우측 위쪽에서부터 빙판을 달려온 이들이 호수 가운데 우뚝 선 홍살문을 통과하며 활을 쏜다. 홍살문 꼭대기에 과녁에 해당하는 홍심(紅心)이 매달려 있다. 230여 년 전이지만 당시에도 나름의 스케이트가 있었다고 한다. 신발 밑바닥에 나무와 철을 붙여 지금의 스케이트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림이 워낙 작아 활 쏘는 군인의 발바닥까지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강세황은 72세가 된 1784년 10월, 외교시찰에 해당하는 사행(使行)을 떠나게 된다. 당시 청나라 건륭제가 50년 동안 나라를 평화롭게 이끈 것을 기념하며 고위 관료뿐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60세 이상의 노인들을 불러모아 ‘천수연’이라는 잔치를 열었다. 그 초청장이 조선에까지 날아왔다. 70세가 넘은 사신을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환갑도 넘기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누가 갈지는 뻔했다. 게다가 강세황은 중국에 가서 그들이 선진 문화를 직접 보고 오는 게 일생의 소원인 사람이었다. 그가 66세이던 해에 실학자 박제가(1750~1805)가 중국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국 학자들을 만나서 나의 막힌 가슴을 터놓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덧 백발이 되었는데 어떻게 날개가 돋을 수 있을까”라는 편지를 적어 보내며 부러워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고 강세황은 체력적으로 녹록지 않은 북경 출장길에 나섰다. 한양을 떠나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길에 본 절경을 화폭에 그리고 글도 같이 적어 시화첩을 꾸몄다. 북경의 호수인 영대에서 펼쳐진 기이한 볼거리를 담았다는 뜻에서 화첩이름은 ‘영대기관첩’이다.

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시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의 도록 글에서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파헤쳤다. 그림과 함께 강세황 일행이 정조에게 올린 귀국 보고 글도 분석했다.

“12월21일에는 황제가 영대에서 빙희를 구경하였습니다. 그날 저희가 도착했고 섬라 사신(暹羅使臣)이 우리 뒤에 섰습니다.… 황제가 빙상(氷牀)을 탔는데 모양이 용주(龍舟)와 같았습니다. 좌우에서 배를 끌고 얼음을 따라가는데 얼음 위에 홍살문을 설치하고 거기에 홍심(紅心)을 달아놓았습니다. 팔기(八旗)의 병정들은 각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신발 밑바닥에는 목편(木片)과 철인(鐵刃)을 부착했습니다. 화살을 잡고 얼음에 꿇어앉아서 홍심을 쏘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말 타고 달리며 표적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설명을 따라 그림을 다시 보자. 홍살문 멀찍이 그림 앞쪽에 모여 선 이들이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다. 섬라 사신은 지금의 태국 외교관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타이식 길쭉한 모자를 쓴 게 특징이다. 사신들 중 긴 관모를 쓴 3명이 눈에 띈다. 아마도 그 옆에 선 흰옷 입은 사람 중 하나가 강세황일 것이다. 중국 황제를 위해 용 모양으로 제작된 얼음판 전용의 가마형 배도 설명과 꼭 같은 모양이다.



강세황은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능통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화가다. 숙종 때 태어난 그는 3남 6녀의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는 64세에 얻은 늦둥이 막내를 무척 아꼈다. 강세황은 일찍이 8살에 숙종 승하를 슬퍼하며 시를 지었고 13살에는 행서를 잘 쓰는 그의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꾸미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영재였다. 어릴 적부터 등에 표범 같은 흰 얼룩무늬가 있어 스스로 ‘표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높은 안목을 가진 감식안이며 손꼽히는 평론가였다. 특히 화원화가 단원 김홍도(1745~1816이후)와 자하 신위(1769~1845)에게 그림을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양한 소재의 그림과 글을 많이 남겼고 비교적 온전히 남아 전하는 작품이 가장 많은 조선 후기 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강세황의 ‘향원익청’. 연꽃 그림의 제목은 멀리 있을 수록 그 향이 더 그윽하다 뜻이다.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그림을 잘 그렸으나 세속의 기운, 즉 속기(俗氣) 없는 그림을 추구했다. 담박하고 깔끔하면서도 도전과 실험정신을 놓친 적 없는 그림과 그의 삶도 꼭 같았다. 흐트러지지 않으려 애쓴 까닭에 자화상을 거듭 그리며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보물 제590호로 지정된 강세황 자화상을 보면 그 꼿꼿한 인품이 그대로 보인다. 북경에 사신으로 가기 직전, 71세 때의 모습이다.

강세황의 유려한 필력, 그 우아하면서 격조있는 미감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는 연꽃을 그린 ‘향원익청(香遠益淸)’이다. 연꽃 또한 군자의 꽃이다. 진흙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잔잔한 물에 씻기지만 요염하지 않다. 표암은 그림 곁에 “연꽃은 멀리서 볼 수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 하였고, 멀리서 바라볼수록 향기는 더 맑고 운치있다”고 적었다. 군더더기 없이 활짝 핀 연꽃과 솟아오른 꽃봉오리만 그렸고 여백을 많이 두어 문인화의 맛을 살렸다. 흰 꽃잎 끝의 붉은 기운은 혀라도 대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널찍한 연잎도 섬세하다. 여린 연잎 하나 차지하고 앉은 개구리와 줄기 뒤에 숨은 풀벌레에서 화가의 재치가 드러난다.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중 ‘영통동구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그런 기발함으로 탄복하게 만드는 그림으로 ‘송도기행첩’에 담긴 ‘영통동구도’를 꼽는다. 지금의 개성에 해당하는 송도에 다녀오며 본 명승을 그렸는데 장면에 대한 작가의 인상이 과감하다. 추상 경향이 가미된 현대미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을 두고 작가는 “영통사 계곡 가에 어지럽게 흩어진 바위들은 정말 굉장해서 크기가 집채만큼씩하며 시퍼런 이끼로 덮여있다. 처음 대했을 땐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고 적었다. 얼마나 놀랐는지는 그림에 표현된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의 기세로 알 수 있다. 기막힌 것은 그림 오른쪽 아래에, 계곡을 돌아 올라가는 나귀 탄 선비다. 몸집 큰 선비를 태운 깡마른 나귀의 다리가 휘청거리건만 몸종 아이는 산 구경에 넋이 빠졌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현대음악가 그로페(1892~1972)의 ‘그랜드캐년’ 조곡 중에서 ‘산길에서’라는 악장이 귓가에 어른거린다고 했다. 오보에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꼭 나귀의 느릿한 말발굽 소리를 흉내내는 듯하다고 했다. 탁월한 선곡이다. 서양의 현대음악과 교류할 수 있을 정도로 앞서간 그림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주 있는 강세황이 절필한 적이 있었다. 그의 서화를 극찬하며 아끼던 영조가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그림 뿐 아니라 시와 글에도 재주 있으니 화가보다는 문인으로 이름 남기길 바란 배려였다. 사흘 밤 눈이 붓도록 눈물 흘렸다는 강세황은 51세부터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다가 영조 사후에 다시 붓을 들었다. 우리에게 이런 문인화가가 있고 그 명작들이 이렇게 남아 전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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