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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길가에서 1시간 맞았지만…“처벌 원치 않아요”

데이트폭력·가정폭력 피해자들 경찰 신고해도

“가해자 처벌 원치 않아” 처벌 못 하는 경우 다수

상담 기소유예·가정보호조치로 풀려날까 우려

“법보다 주먹이 빨라” 두려움에 피해자 접수 거부

미국은 가정폭력도 형사기소…한국은 법안 계류 중





“모텔 가든지 나한테 맞든지 결정해라.”

지난 5일 새벽 2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조금씩 모여들었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을 윽박지르더니 급기야 발로 온몸을 사정없이 차기 시작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긴급출동했지만 피해자 여성은 ‘괜찮다, 신경 쓰지 말라’며 경찰을 돌려보냈다. 남성은 1시간 동안 난동과 폭행을 반복하더니 새벽 3시경 여성을 끌고 모텔 골목으로 사라졌다.

가정폭력 피해자들도 경찰 조사를 만류하긴 마찬가지였다. 7일 새벽 5시 서울 성북구 가정집에서 “남편이 나를 때린다”는 신고가 접수됐지만 정작 지구대 경찰관들이 출동하자 피해자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며 경찰들을 모두 돌려 보냈다. 방 안은 물건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여성의 옷매무새도 심하게 흐트러져 있었지만 경찰은 남편을 폭행죄로 조사하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가정폭력 신고가 허다하지만 대부분 처벌을 원하지 않아 경찰도 방법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 등 연인·부부 간 폭력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만 피해자들의 동의가 없어 경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상 폭행죄는 피해자의 처벌 의사가 있어야만 형사고소가 가능한데, 피해자들이 가해자 보복을 우려해 처벌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가정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김모(43)씨는 “폭력을 당해보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걸 뼛속 깊이 체감하게 된다”며 “경찰을 부르려다 전화기가 부서지도록 맞은 뒤부터 (보복이 두려워) 웬만하면 요청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피해여성들의 ‘NO’ 표시가 실제 의사와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상 폭행죄·협박죄 등은 반의사불벌죄(피해자 처벌의사가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한 죄)다. 피해자 고소가 없으면 사건을 진행할 수 없다. 피해자가 보복을 우려해 제대로 의사를 전달하지 못하는데도 표면적인 거절만 있으면 경찰 조사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정폭력범죄가 가해자 형사처벌이 아닌 일반 가정보호사건이나 상담 조건부 기소유예로 처리된다는 점도 문제다. 사법기관에서 “가정 간 불화는 가정 안에서 처리하라”는 취지로 일반 형사고소 대신 가해자에게 가정상담을 권하거나 가정보호사건(가해자 접근 제한·보호관찰·치료위탁)으로 가정법원에 송치하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가해자의 보복 범죄를 막기 어렵다. 실제로 2년 전 가정상담을 받겠다며 기소유예를 받은 50대 남성이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아내를 살해해 법원에 넘겨지기도 했다. 경찰청과 가정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 2016년 가정폭력상담소를 이용한 피해자 수는 18만 명, 신고 건수는 26만 4,000건이지만 실제로 경찰에 입건된 건수는 4만 5,000명에 불과하다.

◇가정폭력상담시설·경찰 신고 건수와 실제 경찰 입건 건수 비교(단위:건)

상담소 상담 건수 18만 4,821
경찰 신고 건수 26만 4,567
경찰 입건 건수 4만 5,619
자료: 경찰청·여성가족부

미국은 상담이나 가정법원 출석을 이유로 형사고소 접수를 미뤄주는 절차 자체가 없다. 가정폭력을 똑같은 강력범죄로 취급해 기소하고, 재판과 별도로 가정 간 분쟁을 민간기관에서 돕는 ‘댈러스 모델’을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달 가정폭력범죄 가해자에 한해 체포 우선주의를 적용하고 반의사불벌죄 및 상담기소유예를 폐지하자는 법안이 두 건 발의됐지만 모두 소관위에서 계류 중이다. 손명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경찰 고소를 해도 가해자가 되돌아오니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폭력에 순응하게 된다”며 “가정폭력을 가정 내 분쟁 정도로 여기게 만드는 법망의 틈새를 메워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다은·손구민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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