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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영화 속 명대사의 따스한 위로

마음이 울적하고 갑갑해질때면

영화속 명대사를 다시 곱씹으며

행복한 착시에 빠져 여유 되찾아

마음속 영화관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삭막해졌을까





정여울 작가


인간의 두뇌가 놀랍다는 생각을 할 때는 꼭 엄청난 발명품을 봤을 때만은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시도하는 갖가지 상상력들이 바로 놀라움의 원천이 될 때가 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마치 스스로를 위로하는 치유의 시스템처럼 작동하는 다양한 본능적 습관이 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바로 그런 것이다. 너무 바빠서 몸을 챙길 여유가 없을 때, 육체가 피로를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그만, 이건 진짜 네가 아니야. 너 자신을 지켜야 해.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할 때, 설움이 북받쳐와 목이 메여올 때는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까지 잘 견뎌왔잖아.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산 건 아니잖아. 넌 정말 잘했어. 남들이 뭐라 해도, 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거야.”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쓰다듬는 내 안의 목소리, 그것이야말로 가장 외로울 때조차 나를 지키는 힘이 되어준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데 한계에 다다를 때쯤이면 오래 전 영화 속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대사들이 떠오른다. 정말 사랑했던 영화들을 떠올릴 때는 마치 그 주인공들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영화 속 이미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어가는 남자주인공 정원(한석규)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다림(심은하)에게 자신의 상황을 차마 이야기하지 못한다. 단지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만약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 사랑의 ‘시작’과 ‘끝’이 또 다른 아픔으로 그의 가슴을 할퀴지 않았을까. 가장 설레고 아름다울 때, 어떤 아픈 기억도 남기지 않은 채, ‘사랑의 시작’을 마치 영원처럼 가슴에 품고 떠날 수 있도록 그는 다림에게 지금 당장은 보낼 수 없는 마음의 편지를 남긴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당신을 과거의 추억으로 남기지 않고, 영원히 ‘지금 여기’처럼 지속되는 생생한 사랑의 현재로 기억하고 싶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대사는 언제 다시 되뇌어도 슬프도록 아름답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속편 ‘비포 선셋’에서 셀린은 이제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어버린 옛사랑 제시를 바라보며 강렬한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유명한 작가가 되어 파리를 찾은 제시는 9년의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지만, 셀린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사랑했던 그 시간’의 추억 속에 박제된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제시를 바라본다. 셀린은 9년 만에 제시를 만나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내겐 남은 게 없어. 너와 보낸 그날 밤, 나의 로맨티시즘을 모두 쏟아 부어서.” 사랑도 낭만도 열정도, 한 사람이 한 평생 느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감정을 단 하루에 쏟아 부은 느낌이었기에, 셀린은 9년 동안 제시를 그리워하며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그들은 이런 사랑을 속삭이지 않았던가.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아……. 이 시간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 같아.”

마음이 갑갑하고, 손에 일이 잡히지 않으며, 갑자기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외로운 사람처럼 느껴질 때. 나는 영화 속 명대사를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상영하며, 마치 내 머릿속이 아름다운 영화관이 된 것 같은 행복한 착시에 빠진다. 환상이 없다면, 머릿속의 녹음기가 없다면, 마음속의 영화관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삭막해질까. 슬픔이 밀려올 때마다, 지금 당장 영화관에 달려갈 상황이 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내 머릿속의 영화관을 직접 청소하고, 상영관에 불을 끄고, 객석에 앉아 마음 속 스크린에 영사기를 비춘다. 비용도 들지 않고 커다란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멋진 영화관이 내 머릿속에서 아름다운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지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영화관, 내 머릿속의 영화관에서 나는 나를 감동시킨 모든 영화들을 동시 상영한다. 관객도, 스크린도, 오디오시스템도, 심지어 좌석조차 없을 때조차도, 내 머릿속에서는 최고의 영화가 상영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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