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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광조 죽음으로 몰고 간 ‘기묘사화’의 전말은?





22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왕의 남자, 조광조 그는 왜 죽임을 당했나?’ 편이 전파를 탄다.

▲ 조광조의 화려한 등장

조광조는 17살 때 김굉필을 찾아가 유학을 배운다. 당시 김굉필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중이던 상황. 시국사범이나 다름없는 김굉필 밑에서 강단 있게 공부를 한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이 된 후에도 그의 소신을 펼쳤다. 성균관 내에서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 그의 바른 생활 운동을 <그날 인터뷰>에서 만나 본다.

대간은 구제하여 풀어 주어서 언로를 넓혀야 하는데, 도리어 언로를 훼손하여 먼저 그 직분을 잃었으니 (…) 양사(兩司)를 파직하여 다시 언로를 여소서.

- 중종실록, 중종 10년 11월 -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는 조선시대 언론기관, 사간원의 신입관료가 된 조광조는 관직에 제수 된 지 이틀 만에 왕 앞에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들을 모두 파직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권세에 위축되어있던 중종은 패기 있고 소신 있는 조광조의 행보를 눈여겨보게 되는데... 조광조가 왕의 남자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 험난한 개혁가의 길

대사헌이 이르기를 “오늘의 지진은 (…) 소인이 다 물러가지 아니하고, 몰래 화심(禍心)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 중종실록, 중종 13년 5월 -



중종 13년, 전국적으로 큰 지진이 발생하면서 조정 내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지진을 잘못된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생각한 것. 조정 내 관료들은 바른 정치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조광조도 올바른 정치를 위해 몇 가지 개혁안을 주장한다. 그는 유학 이념을 조선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도교식 제사를 관장하는 기관인 소격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학문과 덕행에 밝은 사람을 천거해 인재를 선발하는 현량과를 통해 조정에 새로운 인재를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개혁안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결국 다 실시되고, 조광조가 몰고 온 개혁 바람에 위기를 느끼는 세력들이 생긴다.

▲ 의문의 사건, 기묘사화

조정(朝廷)의 큰일이 이미 정해졌으니, 중간에서 지체하여 도리어 어린 아이 장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빨리 전지(傳旨) [곧 조광조를 죄주는 전지이다.] 를 입계(入啓)하라. 두세 번 재촉했는데도 밤이 다 가도록 결정하지 못하니 매우 옳지 않다.

- 중종 14년 11월 15일 -

중종 14년 11월 11일, 조광조의 바람대로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개정이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나흘 뒤 조광조는 한 밤중에 체포되고 한 달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하룻밤 만에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의문의 사건, 기묘사화. 사건의 배후는 누구인가? 기묘사화의 전말을 들여다본다.

[사진=KBS 제공]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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