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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65년간의 판문점 이야기… '널문리의 주막'서 남북정상회담장으로

시골 술집서 1951년 휴전회담 때 역사 전면에

65년간 분단과 냉전의 아픔 간직한 현장

98년 소떼 방북 등 남북화해의 무대 되기도

남북정상회담을 1주일여 앞둔 지난 18일 남북 정상이 역사적인 만남을 가질 경기도 파주 판문점 내 평화의 집에서 관계자들이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전쟁을 마무리 짓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판문점이 65년 후 다시 한 번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다. 오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1·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평양이 아닌 남측 지역에서 열리는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더욱 주목받고 있는 판문점.

경기도 파주시와 북한 개성시가 맞닿은 지점에 위치한 판문점. 동서 800m, 남북 600m 크기의 넓지 않은 면적에 분단의 역사와 비극, 환희와 애환 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시골의 한 주막에 불과했던 판문점이 역사적 장소로 거듭나게 된 과정을 알아봤다.



군사분계선 확정 후 1953년 10월 판문점/사진제공=통일부


판문점이 역사의 전면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1951년 10월이었다. 당시 유엔군과 북한, 중국은 당초 예정대로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진행할 지를 두고 갈등했다. 같은 해 9월 6일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가 회담 장소의 중립성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릿지웨이는 개성 대신 초가 3채와 주막을 겸한 구멍가게가 있었던 지금의 판문점 자리를 제안했다. 경기도 파주시 널문리 작은 주막에 걸린 ‘판문점’이란 간판을 걸고 회담을 진행하자는 것. 널문을 한자로 쓰면 ‘판문(板門)’이고 여기에 주막을 의미하는 ‘점(店)’이 붙어 판문점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연락장교단은 1951년 10월 22일 정식으로 정전협정 회담장소의 명칭을 판문점으로 할 것과 정확한 회담장소의 위치를 결정했다. 이들은 판문점 양쪽에 있는 네 채의 초가를 중심으로 직경 1km의 원형 지역을 회담장소로 정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판문점에서 만나 정전협정에 서명한다.

분단 이후 판문점은 남과 북을 이어주는 소통 창구 역할을 했다. 지난 17일 통일부가 배포한 ‘남북회담 약사 및 판문점 현황’에 따르면 지금까지 열린 남북회담은 모두 655회고, 이 중 360회가 판문점에서 열렸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156회,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94회,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87회 열렸다. 남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에서도 각각 11회와 12회 회담이 열렸다. 판문점내 첫 남북회담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1971년 8월20일 열린 ‘남북적십자 파견원 제1차 접촉‘이었다.

또한 판문점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분단과 냉전의 중요한 일들의 현장이었다. 이수근 귀순 사건(1967년)을 시작으로 푸에블로호 미군 송환(1968년), 도끼 만행 사건(1976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1998년), 지난해 11월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씨의 귀순까지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한 무대였다.

▲ 이수근 귀순 사건(1967년)

취재차 판문점에 와 있던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 1967년 3월 22일 연합군 측 대표인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올라 남측에 귀순한 사건. 이씨는 후에 귀순용사 대우를 받으며 남측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등으로 인해 제3국으로 출국하려다 붙잡혀 ‘위장간첩’이란 누명을 쓴 채 처형됐다. 2008년 12월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이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 푸에블로호 미군 송환(1968년)



1968년 1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다. 이에 미국은 항공모함 등을 출동시키는 동시에 협상을 진행해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북한은 같은 해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1976년)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을 도끼와 몽둥이로 살해한 사건. 이에 격분한 미국은 항공모함 미드웨이호, F-4 전폭기 1개 대대 등을 급파해 북한을 폭격하려고 했다. 미국의 폭격 위협에 북한의 김일성은 사과문을 연합군 측에 전달했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 사건 이후 남북을 자유롭게 오갔던 판문점에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졌다.

▲ 전대협 임수경 학생의 귀환(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파견돼 밀입북한 임수경이 1989년 8월 15일 판문점을 걸어서 남한으로 귀환했다. 임씨의 귀환은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서 남한으로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임씨의 밀입북은 이후 공안정국을 불러왔다.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1998년)

1998년 판문점에서는 또 한 번의 역사적인 이벤트가 벌어졌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50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간 것. 정 명예회장은 이후 다시 한 번 소떼를 몰고 방북했다. 정 명예회장의 두 번의 소떼 방북은 이후 이어지는 금강산 관광, 남북 경제 협력 사업이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씨의 총격 속 귀순(2017년)

지난해 11월 북한 차량 한 대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향해 달려왔다. 귀순을 막기 위해 북한군은 오씨가 향하는 남쪽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총성이 멎은 후 오씨는 군사분계선 남쪽 50m 지점, JSA 내 우리 측 ‘자유의 집’ 북서쪽 방향에서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채로 발견됐다. 군 당국은 오씨를 급히 아주대병원으로 옮겼고, 이국종 교수가 이끄는 의료진이 수일간의 치료 끝에 소생시켰다.

‘이름 없는 주막’에서 시작돼 한반도 분단과 냉전의 아픔을 고스란히 지켜본 판문점. 지난 65년간의 불신과 단절이 이번 기회를 통해 해소될 수 있을까요?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만남 이후, 판문점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 있을까요?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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