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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낙태, 진짜 죄일까

낙태 건수 연간 17만… 신생아의 절반

죄가 되기에 음지에서 쉬쉬했던 문제들

"태아의 생명권" vs "여성의 자기결정권"

충돌하는 두 가치의 조화방법 모색해야







“모든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한국 천주교주교회 성명윤리위원회)

“낙태죄가 수많은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그 누구도 누군가의 생명이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침묵과 낙태

뱃속의 아이를 법의 허락 없이 지우는 행위, 낙태(인공임신중절).

사실 우리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직접 보고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은 죄가 되기 때문에 모두 쉬쉬했던 문제입니다.

그러다 낙태죄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269조와 270조를 폐지하라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는 23만여명이 동참했습니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해당 법률의 위헌 여부 판결을 진행하면서 ‘과연 낙태는 죄일까’, 사회적으로 생각해볼 문제가 됐습니다.

아이의 심장 소리를 확인한 순간 그 생명의 가능성 자체로 아이를 지운다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낙태는 어떤 경우에 성립이 될까요. 일부 예외적 경우에만 허용되는데 이를 설명한 모자보건법시행령 제 15조에 따르면 △부모에게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등이 해당됩니다.

극히 예외적인 만큼 해당 사실을 밝히기 위한 절차도 복잡합니다.

부모의 질병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질환에서 규정한 것이어야 하고 강간 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산부인과에 고소장이나 법원 판결문을 들고 가야 하는 일도 생기죠.

흔히 돌아오는 반응이 대부분 ‘낙태하고 싶어 남자친구를 강간으로 고소했느냐’는 것이라는 게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의 증언이죠.

사실 이조차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강간을 당했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대부분인데 고소장과 판결문이라뇨.



#17만건 vs 10여건

형법상 낙태죄의 주체는 낙태하기로 결정한 부녀(여성)와 낙태 시술을 한 의사입니다.

낙태한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형 혹은 2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습니다. 낙태 시술을 한 의사는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게 되고요. 낙태를 한 순간 여성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지지만 또 다른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죠.

이와 달리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운 당사자가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인 남성이죠. 남성이 낙태를 강요했다는 증거가 없는 한 법의 레이더는 남성을 향하지 않습니다. 2012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낙태 의지가 없는 여자친구에게 낙태를 권유하고 적극적으로 병원을 알아본 남자친구에게 ‘교사죄’라는 형태로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입니다.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다 보니 다툼 등의 과정에서 여성을 협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꾸 그러면 네가 낙태한 걸 신고할 거야’

죄인이 되는 환자와 의사, 낙태 수술은 자연히 음지에서 진행됩니다. 아주 은밀하게 쫓기면서.

지난해 태어난 신생아 수는 35만여명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추정하는 불법 낙태 건수는 연간 17만 건이죠.

한 해 무사히 태어난 아이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라는 게 낙태의 실상을 실감하게 합니다.



이렇게 큰 규모임에도 낙태는 죄라는 이유로 어디서 어떻게 낙태가 이뤄지는지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부분이죠. 대부분은 인가받지 않은 병원 또는 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낙태를 택합니다.

돈이 없어 병원조차 찾지 못하는 10대들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거나 배를 발로 차는 형태로 낙태를 택한다는 이야기는 충격을 줬죠.

많은 여성들이 임신과 낙태 과정에서 남은 삶뿐만 아니라 목숨에도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음지에서 낙태가 이뤄지고 있지만 낙태죄로 처벌받는 경우는 한 해 열 명 안팎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수의 여성을 처벌하기 위해 다수의 여성을 위협 속에 놓는 게 정의에 맞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임신 기간에 따라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나라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 역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낙태는 단순히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태아의 생명권 vs 여성의 결정권’ 프레임을 깨야 하는 이유

이 가운데 지난달 26일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가 국민 모두의 뜻을 받아 낙태죄 폐지 여부를 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국민투표가 됐죠.

그 결과 전체 336만여명의 유권자 중 64.1%가 참여한 가운데 66.4%의 찬성으로 낙태금지를 규정한 헌법조항이 폐지됐습니다. 국민의 법감정이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건강을 지킬 권리’에 손을 들어줬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법원 등의 판결이 아닌 국민 스스로 정했다는 점에서 아일랜드 국민들의 반응이 유난히 뜨거웠죠. 이제 낙태는 소수 여성의 일탈이 아닌 다수의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조화시키기 위한 고민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국민투표 결과 임신 12주 이전까지는 제한 없이 낙태를 허용하고, 이후부터 임신 24주 전까지는 태아가 기형이거나 임신부의 건강 또는 삶에 위협이 될 때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임신 24주를 기준으로 삼은 이유는 의학적으로 임신 24주부터는 태아가 모체를 떠나서도 생존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는 시기인 점이 고려된 것 같습니다.



태아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절대적 존재라는 입장이 있습니다. 낙태를 죄로 규정한 관점 또한 모든 생명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천주교주교회 성명윤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낸 성명을 통해 “모든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한 사람의 생명으로 보호해야 한다”며 “아이를 임신한 어머니의 자기결정권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더 소중하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반면에 인구 문제가 아닌 여성의 인권을 중심으로 낙태 문제에 접근해달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낙태죄를 규정한 입장은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비롯됐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 시민단체로 구성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그 누구도 누군가의 생명이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며 “국가는 낙태죄 폐지로써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고 목소리 냈습니다.



#언제부터 태아를 생명으로 인식할 것인가, 논의의 시작

기존의 관점이 태아의 생명권을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우선해왔다면 이제는 두 가지의 조화를 위해 ‘언제부터 태아를 생명으로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시작해야 할 시기로 보입니다.

이 가운데 지난해 11월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둘러싼 1차 변론을 듣고 나서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이 한 발언이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태아의 생명권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임신한 여성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낙태를 선택하게 될 수도 있는데 태아의 생명과 충돌하는 가치로만 볼 것이 아니고 두 가지를 조화롭게 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새로운 시각에 대해서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준 셈인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정혜진기자 made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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