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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진칼럼] '수미네 반찬' 웰빙바람, 그리고 10여년 뒤 '헬머니'





대학 신입생 시절, 하숙집에 늦게 들어와 “남는 밥 없냐”고 물으면 주인 할머니는 늘 투덜거리며 시원찮은 밥상을 차려주고는 했다. “작작 좀 늦게 들어와라, 이제 니가 차려먹으라”면서도 펄펄 끓는 국에 찬밥, 쉬어빠진 김치를 내어주던 할머니의 집밥은 맛이 없었다. 강산이 한번 바뀌고 또 반은 바뀌었을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야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문득 그 식은 밥이 생각나곤 한다.

먹방과 쿡방이 전성기를 넘어 과포화되기에 이르렀다. 모두가 가지각색이다. 많이 먹고, 여행가서 먹고, 요리해 먹고, 맛집을 찾아가서 먹고, 미식회를 열고, 음식대결을 벌이고, 식당을 개선해주기까지. 온갖 종류의 먹방 쿡방을 보다보면 예능프로의 절반은 음식이야기로 채워진 듯 하다.

예능 소재의 고갈을 지적하려던 무렵, 기상천외한 쿡방이 불쑥 튀어나왔다. tvN ‘수미네 반찬’의 제작의도를 확인할 때 까지만 해도 ‘김수미의 요리교실’이라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첫 방송이 끝나자마자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맛 때문도, 레시피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김수미의 힘 덕분이었다.



시간을 돌려 2000년대 초중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웰빙’이었다. 유기농 식재료와 MSG를 쓰지 않는 요리법 등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전파된 인터넷을 타고 전국을 휩쓸었다. 채식의 중요성, 건강관리는 물론 한 정치인의 선거 슬로건인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사회적으로 논의됐다.

이 고민은 정권이 바뀌면서 실종됐다. 지난 두 정권의 최대 화두는 ‘헬’이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불렀다. 취업, 결혼, 출산, 내집마련 4포세대라는 말이 등장했고, 이는 곧 7포 9포 ‘다포’로 늘어나며 청년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뭘 해보려면 ‘가만히 있으라’ 하고, 실컷 상처 입히고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며 되도 않는 말장난으로 위로하는 척 했다. 한 정치인은 아르바이트 처우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청년들을 향해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10여년 동안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도심지 주변에는 원룸만 늘어났다.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2005년 317만이었던 1인 가구는 2016년 539만으로 늘었다. 전체 가구 수의 27.9%나 된다. 언론에서는 심심하면 대기업과 금융 공기업의 초봉을 비교하는 기사를 내지만 모두 ‘달나라 연속극’ 같은 이야기다.

이 긴 시간 동안 엄마의 밥상은 편의점 도시락이 채웠다. 포장·배달음식은 이제 그 무엇도 가능해졌다. 도시락과 배달음식을 앞에 놓고 먹방을 보며 먹는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과 밥을 같이 먹는 것 같아 외로움이 덜하단다. 현실이다.





먹방과 쿡방은 이 현실을 잘 이용했다. 최근의 먹방은 소재와 틀에서 유사한 방식을 유지해왔다.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면받는 프로그램이 생기기 시작했다. 1인가구 시청자 다수가 TV가 아닌 모바일과 컴퓨터 등 다른 매체를 이용해 방송을 보기 때문에 화제성은 높지만, 시청률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수미네 반찬’ 역시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셰프들을 앞에 놓고 엄마의 손맛을 가르치는’에피소드들은 형식만 따져봤을 때 식상하다. ‘집밥 백선생’은 물론 수십년 전부터 했던 요리 방송들과 다를 바가 없다. 딱 한 부분만 빼고.

우리가 김수미의 욕을 들은 것이 한두해던가. 오죽하면 그를 주인공으로 ‘헬머니’라는 영화까지 나왔을까. 헬머니의 진가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시원시원한 말에서 나온다. 양식과 중식계에서 유명한 셰프들을 모아놓고 뱀 감듯 휘감는 카리스마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재미를 넘어 쾌감까지 느껴지곤 한다.

고작 2회분이 방송됐을 뿐이지만 헬머니 특유의 멘트는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장동민의 “자격증 있냐”는 물음에 “니 엄마랑 할머니가 자격증 가지고 밥먹였냐”고 받아치거나 “후추는 는둥만둥 넣어라”, 식초와 간장 비율을 묻자 “알아서 해서 찍어먹어봐”라는 대답은 우리 엄마, 할머니와 똑같다. 아주 많이.

그렇게 고사리와 묵은지로 만든 반찬들이 완성됐다. 입담에 빠져들다보면 뚝딱 만들어지는 반찬들은 빛깔부터 예사롭지 않다. “자취생에게 팔고, 일본에서 팔고, 아프리카에서도 팔겠다”는 김수미의 호언장담이 어쩌면 진짜 이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김수미가 말하는 맛이었다. 정량에 대한 계산 없이 만들어내는 엄마의 손맛, “내 세대가 끝나면 엄마가 해주던 반찬을 맛보지 못할 것 같았다”는 그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제작발표회 당시 새벽 네시부터 일어나 기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왔다면서도 쑥스러움에 “맛 없으면 버리라”고 툭 내뱉는 그 마음에 할머니의 사랑이 담겼다.

먹방 쿡방이 소비에만 그치는 시기, 마음만으로도 살이 통통 차오르게 하는 헬머니의 마음이 따스하다. 세상과 벽을 쌓게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엄마 손 맛 김치찌개 한그릇. 그 정성이 닫혀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최상진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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