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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 민규동 감독 "짓밟힌 폭력의 역사, 치유는 우리 몫이죠"

6년 이어진 23번 관부재판…절제된 시나리오로 감정이입 줄여

위안부 과거 소홀히 했던 사회 비추고 관객과 책임 통감 원해

민규동 감독 /사진제공=NEW




90년대 초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인터뷰를 보고 가슴 속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얹었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반드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이때 가슴 깊숙이 자리 잡았다. 마음이 급해진 건 지난해 4월 이순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시모노세키에서 진행됐던 23차례 관부재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일부 승소했던 이 재판의 마지막 원고가 이 할머니였다.

관부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 ‘허스토리’를 연출한 민규동 감독은 22일 서울 팔판동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위안부 소재 영화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대신 현재에 말을 거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아픈 역사를 소홀히 했던 나의 반성문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적 치유를 미뤘던 사회, 관객 모두가 책임을 통감하고 연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위안부 소재 영화를 꼭 만들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

“우리는 위안부 할머니의 아픈 역사를 박물관에 넣어 가두려 한다. 영화를 통해 현재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허스토리’는 2년 전 자료 조사를 하던 중 할머니들의 재판을 도운 원고단 단장(극중 문정숙)의 흔적을 발견하고 써내려 갔다. ‘허스토리’보다 앞서 완성한 시나리오가 두 편 있다. ‘허스토리’까지 위안부 3부작인데 어째서 가장 마지막에 쓴 ‘허스토리’를 가장 먼저 내놨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영화든 영화화되고 관객을 만나기까지 시대적 요청이 있다고 생각한다. ‘허스토리’를 먼저 내놓은 것은 과거의 아픈 역사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위안부 이야기를 힘들어하고, 다 안다고 생각할까.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았고 아직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은데도 피로감만 느끼는데 ‘나부터 반성해보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해방 직후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와 사이판에 끌려간 여성을 소재로한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다. ‘허스토리’가 남은 두 이야기를 꺼내놓을 계기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민규동 감독 /사진제공=NEW


-같은 위안부 소재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사회의 차별적 시선을 딛고 일어서는 할머니들과 문정숙의 성장 스토리라는 점이다.

“남성들이 많이 나온다고 남성 영화라고 하지는 않지 않나. 여성영화라는 표현은 쓰고 싶진 않다. 위안부 영화나 운동은 대부분 꽃다운 처녀들이 희생당했다는 논리, 우리가 힘이 약해 일제에 짓밟혔다는 민족주의적 논리에 그쳤다. 이 과정에서 개별 여성의 아픔은 치유될 수 없었고 우리 역시 이들을 품는데 소홀했다. 전쟁 속에 피해를 입었던 약자들, 폭력의 역사를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했던, 이들을 이 사회에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우리 사회를 비추고 싶었다. 결국 아픔의 역사를 치유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6년간 이어진 23번의 재판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영화의 힘을 얻기 힘들었을텐데 촬영 당시, 그리고 편집 과정에서 어디에 주안점을 뒀나.

“공분을 일으키는 의도로 만들어진 플래시백(과거 회상 장면)은 최대한 피했다. 시나리오도 최대한 건조하게 쓰려고 했고 촬영 당시 충분히 절제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후시녹음에서 더욱 감정을 뺐다. 관객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우리부터 울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로즈업도 거의 없다. 감정이입을 무기로 쓰고 싶지 않았다. 23번의 재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데선 물론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재판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성장하는 문정숙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문정숙을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영웅적 인물로 그리는 대신 우리처럼 똑같이 위안부 문제에 소홀했지만 서서히 할머니들의 아픔을 직시하고 함께 서는 인물로 그려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움직이고 싶었다.”



지난 15일 부산에서 열린 ‘허스토리’ 관객과의 대화에서 민규동(오른쪽부터) 감독이 김해숙 배우,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 김희애 배우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NEW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배정길 역을 맡은 김해숙 씨는 영화 촬영 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던데.

“촬영 내내 울음을 멈추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감정을 풀어헤치고 싶어도 내가 번번히 막으니 그게 마음의 병이 됐던 것 같다.”

-원고단 단장 문정숙 역으로 김희애 씨를 캐스팅한 이유는.

“중견연기자지만 영화 쪽에선 거의 발굴되지 않은 원석 같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원래 김희애 씨는 비열한 악인을 꼭 맡겨보고 싶었던 배우다. 문정숙 역할을 맡을 배우를 물색하던 중 화통한 여장부 연기를 맡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평소 캐릭터 변신을 고민하던 김희애 씨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한국영화에는 부산 남자에 대한 재현이 많은데 부산 여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번 영화로 자존심이 세고 자립심 강한 부산 여자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이들의 연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면 스카프나 브로치를 빼놓지 않는 멋쟁이지만 잔주름, 흰머리, 기미가 다 보이고 치마를 한 번도 입지 않는다. 실제 인물인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이다. 다만 배우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 실제 인물과 만날 기회는 개봉 직전 관객과의 대화 때까지 만들지 않았다. 지난 번 부산 시사회에서 김문숙 회장과 김희애 씨가 만났는데 ‘멋지게 표현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뿌듯했다.”

-남성 캐릭터의 배치는 어떻게 했나.

“우선 변호사 역할에 김준한 배우를 캐스팅해 남녀 대결 방식의 구도를 피했다. 특히 김준한 배우는 남성성을 배제하고 변호사로서 전문성이 부각되는 연기를 하도록 주문했다. 김준한 배우는 쟁쟁한 선배 연기자들 가운데서도 제 역할을 해줬다. 또 하나의 시선은 택시 기사다. 첫 번째 기사는 부끄러운 역사를 들춘다며 할머니들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자극하지만 마지막 기사는 이들을 응원한다. 이들의 변화를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데뷔작 제목 역시 ‘허스토리’(1995)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단편영화인데 이번에도 같은 제목을 꺼내든 이유가 있나.

“70년대 여성주의자들이 찾아낸 ‘허스토리’(herstory)라는 단어를 첫 단편 제목으로 썼고 이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확장해서 만들었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히스토리가 아니라 허스토리입니다(not history but herstory)’라는 문구를 쓴 건 영화가 그들을 위안부로 바라보기보다 여성으로 바라볼 때 더 이해의 폭이 깊어진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23년 전에는 허스토리라는 제목이 낯설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때가 되지 않았나 기대하고 있다.” 27일 개봉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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