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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월인석보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세조는 1455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후계자 선정에 착수했다. 같은 해 큰아들 장(暲)을 도원군으로 봉한 뒤 세자로 책봉했다. 훗날 의경세자라는 시호를 얻게 되는 도원군은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좋아했으나 몸이 약한 것이 문제였다. 급기야 1457년 큰 병이 들자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공작재(孔雀齋)를 열어 세자가 병을 털고 일어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의경세자는 그해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세조는 이때의 괴로움을 이렇게 말한다. “큰아들이 지레 죽어 없어지니 오랜 시일이 지나도 슬픈 마음이 어찌 사라지겠는가. 삼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여기서 세조가 말하는 ‘이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월인석보(月印釋譜)’다.





세조는 아버지인 세종이 지은 찬불 서사시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삼고 자신이 수양대군 시절에 엮은 석가모니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주석으로 붙여 월인석보를 편찬했다. 석보상절이 탄생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가 있다. 1446년 어머니인 소헌왕후가 별세하자 효심이 지극했던 세조는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 서적을 공부한 뒤 언문으로 석보상절을 지어 세종에게 바쳤다. 이에 감동한 세종은 이듬해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생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월인석보를 지었다는 견해도 있다. 총 25권으로 돼 있었으나 전란 등으로 유실돼 현재는 18권이 남은 것으로 문화재청은 파악하고 있다. 월인석보는 한글 창제 이후 발간된 첫 산문자료인데다 훈민정음 언해본까지 실려 있어 국어국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이 월인석보의 스무 번째 책(권20)이 18일 케이옥션 경매에서 3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보물 제745-11호인 이 책은 원래 개인 소장자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했다가 찾아간 뒤 경매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매 이후 “문화재를 함부로 사고팔아도 되느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개인 소장품은 국외로 반출하지만 않으면 거래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손상되거나 유실되는 일이 없도록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철저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철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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