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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김언호 한길사 대표] 혼돈의 시대 이정표 '책의 힘' 잊지 말아야

군사정권 아래

자유언론운동으로

기자 접고 출판사 열어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

사전검열에 맞서 큰 반향 불러

시대 밝혀주는 책 계속 만들고파

김언호 한길사 대표이사./이호재기자.




40년 넘게 출판 외길을 걸어온 김언호(73·사진) 한길사 대표에게 책이란 무엇일까. 삼라만상이자 예술품이다. 어떤 이야기를 건네도 그의 결론은 ‘책’이다. 이야기 곳곳에는 으레 책에 얽힌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정도로 오랜 세월을 출판업 한 우물만 판 그이지만 책을 만드는 자세는 여전히 젊은이처럼 씩씩하고 경건하다. 책을 만드는 일에 그 어떤 예술가보다 혼신을 다하는 것이 김 대표의 흔들림 없는 자세이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순화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만난 김 대표는 여전히 책으로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책 시리즈 출간을 앞두고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그는 “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너무나 근사한 일”이라며 천진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책으로 세상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지를 여전히 고민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책 한 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김 대표의 책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가 책을 대하는 모습을 직접 보니 정말이지 꿈에 부푼 청년 같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신생아를 대하듯 기대에 차 있는가 하면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우지 못할 첫사랑을 마주한 사람 같기도 했다. 어쩌면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청년 김언호가 동료들과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치다가 1975년 회사로부터 해직되고 이듬해인 1976년 12월 출판사 한길사를 세운 것은 그로 하여금 ‘책’으로 돌아가라고 예비된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 대표에게 어린 시절의 책 읽기는 세상과 만나는 통로이자 세상을 읽고 해석하게 해주는 스승이었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농사를 지으며 학교를 다녔다. 시내 서점에 가는 날은 소년 김언호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김 대표는 그때 서점에서 평생 존경하게 될 함석헌과 삶의 지향점을 처음 만났다고 돌아봤다. “서점에서 처음으로 함석헌 선생님을 만났죠. 책을 통해서요(웃음). 함 선생님은 사상계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죠. 생각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해요. 요즘 ‘창조 창조’ 하는데 말로만 창조가 되는 게 아니에요.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창조적인 개인, 창조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김 대표는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은 가장 높은 차원의 문화복지라고 생각합니다. 독서율이 해마다 하락해 지난해에는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성인이 10명 중 4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책을 읽지 않게 그냥 두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 많은 책이 구비된 도서관을 충분히 만드는 것이 첫 번째고 그다음은 서점이에요. 책방은 가장 열려 있는 시민사회죠. 책방에는 돈을 버는 것부터 그림을 그리는 방법, 고전을 만나는 방법까지 모든 것이 있습니다.”

책방과 책은 그의 말대로 열려 있는 시민사회다. 그가 만들어냈던 책들 역시 우리 시민사회를 깨어나게 했고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출판인 김언호가 있었다. 그는 1970~1980년대 사전검열·판금 등이 다반사였던 암흑기에 책으로 우리 사회를 밝힌 인물로 그가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김 대표는 이 책을 출간한 후 벌어졌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79년 10월30일이었죠. 문화공보부로 호출돼 갔습니다. 대통령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되는 10·26 정변 직후였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문공부의 출판 담당 과장은 저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 친일 좀 했다는 게 어떻다는 거야’라며 그 정변 열흘 전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오른손에 들고 흔들어 댔습니다. 임종국 선생의 ‘일제 말 친일군상의 실태’를 검열했던 모양이었습니다. 문공부에 나와 있던 군인도 나에게 ‘이번에는 봐준다. 다시 이런 짓을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어요.”



그런 시련을 겪은 김 대표이지만 “한 권의 책(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우리 시대를 일으켜세웠다”며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았습니다. 사전검열·사후검열을 당하면서 우리는 책을 펴냈고 책을 읽었어요. 저자들도, 출판인들도 잡혀갔습니다. 책을 읽었다고 독자들도 잡혀갔죠. 그러나 우리는 책을 쓰고, 책을 만들고, 책을 읽으면서 나라와 사회의 민주주의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시대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김 대표에게 ‘인생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이 ‘우문’이었다는 것을 일깨우는 ‘현답’을 돌려줬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믿지 않아요. 여러 권의 책을 두루두루 읽어야 합니다. 먹는 것도 고기만 먹으면 안 되잖아요.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도록 다양하게 먹어야 합니다. 친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런 친구, 저런 친구 두루두루 다 사귀어야 시야가 넓고 깊어지듯 책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이사./이호재기자.


김 대표는 2016년 세계 서점을 직접 다니면서 보고 쓴 ‘세계서점기행’을 펴내기도 했고 여전히 세계 곳곳의 책을 사모으는 ‘북컬렉터’이자 좋은 책을 펴내는 데 쉼이 없는 ‘퍼블리셔’다. 늘 책과 관련된 일을 꾸미는 낙으로 산다는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서점에 가는 운동을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에는 유럽 서점에 갔고 올해는 중국 서점을 둘러볼 것”이라며 “독자들과 함께 서점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다. 김 대표는 또 최근에는 ‘큰 책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프랑스 미술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성서’다. 책의 크기가 가로 28.5㎝, 세로 42.3㎝에 달하며 무게는 무려 5.5㎏이다. 책은 직접 보면 놀랄 정도로 크고 무겁다. 지금처럼 휴대하기 편한 크기가 아닌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던 시대의 책이 시간을 거슬러 툭 하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요즘은 종이책의 미학에 관심이 가요. 종이책의 아름다움, 종이책의 역량에 대해서 말이죠. 종이책의 아름다움과 아우라를 스마트폰이 흉내 낼 수 없어요. 책은 콘텐츠를 담는 형식이지만 아름답게 만들어야 해요. 내용만큼 형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대표는 2011년부터 ‘파주북소리’ 조직위원장을 비롯해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1년 처음 시작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책 축제인 파주북소리는 국내외 출판사 100곳이 참가한다. 축제기간에 파주 북 어워드, 독무대 낭독 공연, 북앤쿡 토크 파티, 입주사 오픈 하우스, 도서 전시 및 푸드존 운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김 대표는 오는 9월14~16일 열리는 ‘2018파주북소리’는 남북 평화 공존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는 북미 지도자의 ‘세기의 만남’이 있었고 남북의 공존과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어요. 봄에는 조용필·이선희·레드벨벳·윤도현·강산에·정인 등이 평양에서 ‘봄이 온다’ 공연을 했고 가을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제안으로 ‘가을이 왔다’ 서울 공연이 추진되고 있죠. 그래서 파주북소리도 올해는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도모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관련 행사를 9월 중순까지 하기로 했고 집행위원회를 만들어서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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