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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원천 수학·과학 뿌리째 흔들] "가뜩이나 덜 배우고 와 골치"...'수학·물리 보충수업'하는 대학

■대학.학생들 현실은

교수들 "신입생 기초실력 저하, 고교 수업처럼 느껴져"

"고득점 어렵다" 수험생은 공학 전공 필수 물리Ⅱ 외면

대입서 특목고 우대 심화 예상...고교서열화 조장 우려





“대학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배우다가 정작 전공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는 ‘김상곤 세대’가 탄생할 겁니다. 이대로라면 한국 대학생들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서울의 한 사립대 부총장은 오는 2021학년도부터 반영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의 과목 변경을 두고 한탄을 쏟아냈다. 공대 교수 출신인 그는 “공대에서는 지금도 학생들의 수학과 물리 실력이 충분하지 않아 수업에 지장이 크다. 신입생 강의 초반에는 대학 강의실이 아니라 고등학교 교실처럼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다.

교육부는 2021학년도 수능부터 ‘기하와 벡터’를 배제한 데 이어 이듬해 수능부터는 과학 심화과목인 과학Ⅱ도 빼기로 했다.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라는데 정작 학생들은 대학 진학 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혼선만 더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대학교수들은 “기본기가 없는 학생들에게는 가르쳐봤자 알아듣지 못한다”고 난감해하고 있다. 김태완 서울대 교수는 “단순히 ‘기하 공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기하는 수학계의 언어라고 봐야 한다”며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기하 개념을 포함한 선형대수 같은 것을 배워서 오는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정보기술(IT) 영역에서 영원히 선진국들을 따라잡지 못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른바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시험’인 수능은 오히려 대학 수학에 필요한 범위를 계속 덜어내고 있다. 물리Ⅱ에서 다루는 내용은 기계공학·전기정보공학 등 공학 전공자들에게 필수적인 과목이지만 수험생들은 노력 대비 고득점 기회가 적은 물리Ⅱ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라면 굳이 물리Ⅱ를 선택할 필요가 없어서다.



대학의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국내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서울대는 지난 6월 공대 신입생 중 물리Ⅱ를 배우지 않은 학생들에게 ‘물리학 기본’ 과목을 의무 이수하도록 규정을 고쳤다. 가천대는 9일 공대와 바이오나노대·IT대·경영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2학기에 물리·화학·수학 과목 보충클래스를 개설한다며 지원자를 모집한다고 공고했다. 기초 지식이 부족해 수업 성적이 낮다고 판단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하라는 취지다. 아주대는 예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겨울방학 중 기초수학·기초물리학 등을 가르치는 ‘신입생 예비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 관계자는 “보충반을 따로 만들고 있지는 않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동국대 교수는 “학생들의 기초학력 부진이 특정 과목 기피 현상으로 나타나고 이는 학문적 욕구·동기 저하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격차가 벌어지면서 ‘전공 포기자’가 속출하는 사태가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같은 대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어느 수능 세대인지’에 따라 강의 이해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될 수밖에 없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모(27)씨는 “기하와 벡터를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대학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님들이 ‘벡터’라는 단어를 일상어처럼 쓰더라”라며 “저학년 때는 그럭저럭 버티지만 3~4학년으로 올라가면 어차피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 수업 수강을 위한 사교육이 대학생 사이에서 유행한 것은 이미 수년이 지난 일이다. 앞으로 대학과 고교 간 수업의 괴리가 심해질수록 대학 내 ‘열등 학생’의 출현은 더욱 늘어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대학과 학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수능 과목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교육부는 6월 ‘2022학년도 수능 과목구조 시안’에서 과탐Ⅱ 과목을 완전 제외하고 탐구영역에서 과학 1과목과 사회 1과목씩만 선택해 치르도록 바꿨다. 지난해 2021학년도 수능 출제범위 발표 때는 ‘기하와 벡터’를 빼 과학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교육부는 “기하가 모든 이공계의 필수과목으로 보기 어렵다”며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원활한 운영과 수험생의 부담 완화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기하와 과탐Ⅱ가 진로선택과목으로 분류돼 있어 이에 맞췄다는 설명이다. 이공계의 우려도 “이공계에 진학을 할, 필요한 학생들만 해당 과목을 배우면 된다”고 외면했다. 하지만 물리Ⅱ 기피 사례에서 보듯 반드시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는 어려운 과목을 학생들이 찾아서 공부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만만찮다.

한편 정부의 수능 과목구조 개편은 일반고와 과학고·영재고와의 격차를 더 벌어지게 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수험생들의 기초 학력 저하를 우려하는 대학으로서는 기하와 벡터·과학탐구Ⅱ를 공부한 학생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수시나 논술 전형 등에서 과학고·영재고 학생 선호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 학부모는 “고교 서열화를 탈피하겠다는 정부가 고교 서열화를 더 조장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일반고에서 열심히 공부해봤자 이공계 대학 면접에서 대놓고 차별하지 않겠나 하는 불안감이 있다”고 말했다.
/진동영·신다은·오지현기자 j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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