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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위장전입

“부동산 매입을 투기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이런 것도 투기입니까.” 김영삼 정부의 첫 내각에 낙점받았던 박양실 보건사회부 장관은 1993년 3월 아들딸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일자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다. 주소지를 살지도 않는 곳으로 옮겨 절대농지와 재건축 예정이던 아파트를 샀지만 합법적이었다는 강변이다. 여론이 급격히 나빠졌다. 가뜩이나 직전에 실시된 공직자 재산 공개로 상당수의 장관들에게서 문제가 드러나 뭇매를 맞던 정부였다. 김 대통령은 더 이상 견디지 못했고 박 장관은 ‘열흘짜리 장관’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위장전입이 우리나라에서 활개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시의 고교 배정 기준이 출신 중학교에서 거주지 중심으로 바뀌면서부터다. 자녀들을 서울 강남으로 이전한 ‘명문고’에 입학시키기 위한 전쟁이 일어났다. 소위 ‘8학군병(病)’의 시작이었다. 서울시 교육위원회와 서울시경의 합동 조사에서는 실제로 살지 않으면서 주소지만 옮겨둔 중학생이 3분의1이나 됐다. 위장전입이 얼마나 심했는지 1982년에는 신군부의 전위 기구였던 사회정화위원회까지 나섰을 정도였다. 단속이 심해지자 자녀를 명문고에 진학시키기 위해 아예 주변의 집을 사려는 이들이 속출했다. 1980년대 강남에 휘몰아친 투기 열풍에는 개발 붐만큼 뜨거웠던 교육 열기가 있었다.

거짓 주소지가 횡행하다 보니 도덕성도 희미해졌다. 주민등록법에 거짓 신고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자식을 위한다는데 이 정도의 위법이 문제가 되느냐는 식이다. 김대중 정부 말기 장대환 국무총리 후보자 자녀들의 위장전입이 문제가 되자 “맹모삼천(孟母三遷)으로 이해해달라. 아이들 교육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잘못 판단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고위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를 할 때마다 위장전입 문제가 이슈로 부각됐지만 실제로 이 때문에 직에서 물러나는 이는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은애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무려 8번 위장전입을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이 후보자만이 아니다. 인사청문회 대상자의 절반인 5명이 자의든 타의든 주민등록법을 어겼다. 모두 헌법을 지키고 국정을 책임져야 할 이들이건만 준법의식은 희미하기 그지없다. 사회는 변해가는데 고위공직자들은 변한 게 없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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