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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외국계 리포트와 뫼비우스의 띠

임석훈 논설위원

외국계 의견에 증시 쇼크 반복은

국내증권사 기업 눈치보기 급급

부정적분석 발표 망설이기 때문

자본시장 문화 바꿔 고리 끊어야





1998년 10월29일 일본 노무라증권이 4쪽짜리 리포트를 냈다. 제목은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for Daewoo Group)’.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를 진단한 보고서는 “최악의 경우 대우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파급효과는 파괴적이었다. 보고서가 공개되자 외국 은행들은 물론 국내 은행들까지 채권 회수에 나서면서 대우는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리포트 공개 한 달 뒤인 11월 말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수출금융만이라도 열어달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금난에 빠진 대우는 이듬해 8월 노무라증권의 예언대로 워크아웃이 결정돼 해체 수순을 밟았다.

그로부터 딱 20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 자본시장에서 외국계 증권사 리포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노무라증권 보고서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시장을 요동치게 한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덩치가 커지고 기업들은 탄탄해졌다고 하는데도 그렇다. 최근에는 한국 경제의 주력인 반도체와 신성장동력으로 주목받는 바이오산업이 주 타깃이 되고 있다.

지난 8월6일 미국계 모건스탠리는 SK하이닉스 투자의견을 ‘비중 확대’에서 ‘비중 축소’로 변경했다. 그 충격에 이날 하이닉스의 주가는 5% 가까이 빠졌다. 이틀 뒤인 8일에는 모건스탠리에 골드만삭스까지 가세해 나란히 반도체 업종 투자의견을 ‘중립’에서 ‘주의’로 내렸다. 시장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두 회사의 주가 모두 3% 넘게 급락했다. 삼성전자는 그 뒤 20일까지 연일 52주 신저가를 경신했을 정도다.

바이오주도 외국계 리포트를 비껴가지 못했다. 8월13일 골드만삭스가 셀트리온의 적정주가를 시가의 절반 수준으로 후려치는 보고서를 내자 셀트리온 주가는 4% 이상 떨어졌다. 하루 사이 시가총액이 1조5,000억원가량 날아간 것이다. 함께 혹평을 받았던 한미약품 역시 7% 넘게 폭락했다. ‘골드만 쇼크’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9월 들어서도 반도체·바이오에 대한 외국계의 매도 리포트는 진행형이다. 외국계 증권사의 매도 보고서가 나오면 외국인투자가가 이탈하면서 주가가 하락하고 국내투자자들이 동참해 낙폭이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때마다 시장은 출렁이고 개인투자자들은 외국계의 공매도 농간이라며 비명을 지른다. 국내 증권사들이 외국계 리포트와 다른 전망을 내놓아도 별 소용이 없다. 마치 풀리지 않는 얽힌 실타래, ‘뫼비우스의 띠’ 같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바라볼 만큼 한국 경제가 성장하고 증시 시총이 세계 10위권으로 올라섰는데도 왜 외국계의 입김에 휘둘리는 걸까. 외국인투자가의 비중이 높고 세계시장을 상대하는 외국계의 세일즈 역량과 분석력이 뛰어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외국계의 전망이 맞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골드만 쇼크 이후 한 달 만에 셀트리온과 한미약품의 주가는 되레 10% 이상 올랐다.

그런데도 투자자들은 국내 증권사 리포트보다 외국계 보고서를 더 믿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은 매도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한국의 자본시장 문화 탓이 크다. 비즈니스가 끊길까 염려해 기업의 눈치를 보는 증권사, 부정적인 분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업과 투자자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한국 증권사에서는 매수 의견이 대부분이다 보니 외국계가 내놓는 매도 리포트에 관심이 집중되고 시장이 바로 반응한다. 국내 증권사와 기업들 스스로 외국계의 영향력만 키워주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국내 상장사·증권사·투자자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

이제 한국 경제와 증시의 위상에 맞게 자본시장 문화를 바꿀 때가 됐다. 뫼비우스의 띠를 푸는 방법은 하나다. 바로 띠를 자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매도 리포트를 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증시 참여자 모두의 몫이다. 외국계에 휘청이는 시장을 보며 언제까지 ‘참담하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자조하고 있을 건가. /sh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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