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여명] 전문가 수난시대

최형욱 디지털미디어부장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지만

전문지식까지 똑같진 않아

전문가 홀대 문화 지속되면

피해는 결국 국민에 돌아가





지금 유럽은 후진국병인 홍역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2만4,000명의 홍역 환자가 발생했고 올해는 상반기에만 4만1,000명에 달했다. 홍역으로 인한 사망자는 지난해 38명, 올해 상반기는 37명에 이른다. 홍역은 전염성이 강한데다 최악의 경우 실명이나 사망에 이른다.

하지만 백신만 맞으면 거의 완전히 예방할 수 있다. 선진국이 몰려 있는 유럽이 어쩌다 이런 사태를 빚은 것일까. 홍역 백신이 자폐증 등 다른 질병을 유발한다는 잘못된 의학정보가 퍼진 탓이다. 의료 전문가들이 공중보건과 아동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백신이 최선이라고 해도 믿지를 않는다. 정치권은 일반 대중에 영합해 불안감을 부추기고 있다.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부는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1년간 유예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이 백신 접종 의무화를 반대하고 있다.

의료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어디 유럽만의 문제랴.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려 죽을 수 있다는 괴담이 퍼지면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몇 년 전 몇몇 엄마들은 극단적인 자연치유 육아법을 내건 인터넷 카페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안아키)’에 빠졌다가 아이들의 병을 키우기도 했다.

사실 전문가 집단이나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했다. 빈부격차나 실업난 등이 심화하면서 기존 체제를 이끌었던 엘리트들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출현이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등이 모두 정치권 주류에 대한 거부 표시였다. 사회 시스템이 고장 나면서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인터넷의 발달은 이를 더 가속화했다. 클릭 몇 번만 하면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이다. 진영논리가 판을 치면서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사실로 인정하려고 한다. 특히 이념적 지향점이 다른 쪽의 전문가 의견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나 ‘정권의 나팔수’, 혹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정치권은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 불신감을 부추기고 표를 끌어모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변화를 공산주의자나 중국, 일부 과학자들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해버렸다. 지지기반인 미국 중서부 지역의 제조업 근로자를 의식해서다. 과학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린 객관적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판이니 사회적 논의나 대책이 진전될 리 만무하다.

‘촛불 정부’와 ‘국민 주권’을 전면에 내건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적폐 집단으로 보지는 않겠지만 신뢰한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탈원전이나 대입 정책 공론화 과정을 보노라면 불신에 가깝다. 전력수급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일반인 500명이 결정하라며 원전 전문가는 공론화 과정에서 빼버렸다. 대입 정책을 다룰 때도 당사자인 대학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해당 분야에서 축적된 지적 역량과 경험을 외면한 것이다.

나아가 전문지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다는 점을 무시하는 듯하다. 최근의 통계청장과 기상청장 경질 논란이 대표적이다. 청와대의 부인에도 전임 통계청장은 정권 입맛에 맞는 소득통계를 내놓지 않아서, 전임 기상청장은 태풍 ‘솔릭’ 예보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경질됐다는 의혹이 여전하다. 전문지식을 홀대하는 사회 풍토가 지속되다 보니 통계청은 생명과도 같은 신뢰도를 의심받는 실정이다.

물론 과거 각 분야의 일부 전문가들이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전문성과 도덕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원전 마피아’건 ‘교육 마피아’건 내부 카르텔을 만든 뒤 개인적 이익을 취하고 정권 줄 대기에만 열을 올렸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국가 운영이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들이 배제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국가의 주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생 쌓아 올린 지적 자산이나 통찰력까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choihuk@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