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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논단]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 바라보는 노병의 悔恨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옛 전투 가르치는 이스라엘과 달리

6·25에 무덤덤한 韓 역사교과서

후세에 알리고 그 의미 되새겨야





지난 1일 강원 철원 지역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 초입에 있는 군부대에는 ‘반드시 조국의 품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다. 폭발물처리반·의무대·감식단 등 인원과 장비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화살머리고지는 오른쪽 3㎞에 위치한 백마고지와 함께 6·25전쟁의 격전지인데 이곳에서 9월19일 제5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공동 유해 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북한 측에서 상응하는 작업을 완료하면 유해 발굴이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남북이 상생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격전지의 유해 발굴에는 특별한 의미가 많다. 우선은 6·25 참전 노병들의 생각을 헤아려드려야 한다.

북한군에 전면남침 개시를 알리는 ‘폭풍’ 명령이 하달된 것은 1950년 6월25일 새벽4시였다. 북한군의 제1·2·3·4·5·6·12사단과 제105전차여단 등은 소련제 전차를 앞세우고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철원, 강릉 등 다섯 개 방면의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38선을 돌파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까지 1,129일 동안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든 6·25전쟁의 서막이었다. 파죽지세의 북한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을 압박하며 적화통일을 눈앞에 뒀지만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38선 너머로 패주했고 이후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바뀌면서 한반도의 허리 부분에서 전선이 교착되고 1951년 여름 휴전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정전 이전에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펼쳐졌고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가 바로 그런 격전지였다.

백마고지는 한국군과 중국군이 혈투를 벌인 곳이다. 1952년 10월 고지를 지키는 한국군 제9사단은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꼬박 10일 동안 사투를 벌였고 고지의 주인은 12번이나 바뀌었다. 화살머리고지 역시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요충지로서 두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52년 10월 프랑스 대대가 중국군을 격퇴한 전투였고 두 번째는 휴전을 코앞에 둔 1953년 6월 한국군 제2사단이 중국군의 공세를 막아낸 전투였다. 중국군은 제29사단을 백마고지에, 제73사단을 화살머리고지에 투입해 두 고지를 동시에 점령하고자 했다. 수적 열세로 고전하던 한국군은 7월9일 화살머리고지를 중국군에 넘겨줬지만 역습을 통해 7월11일 재탈환했다.



화살머리고지는 수많은 젊은 죽음이 묻혀 있는 곳이다. 계급과 이름 다섯 글자만을 남긴 채 종적을 감춘 실종자들의 상당수가 이런 격전지에서 황망한 죽음을 맞았거나 북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 교과서는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왜 그토록 많은 생명이 무명용사가 돼 65년 동안 차디찬 땅속에 있어야 했는지, 왜 16개 나라 195만명의 군대가 유엔군으로 참전했고, 왜 4만여명의 미군이 전사했는지 등에 대해 무관심하다. 화살머리고지에서 싸웠던 프랑스인 장 르우 병장은 2016년 84세로 타계하기 직전 자신이 싸운 격전지에 영면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은 프랑스참전용사협회와 한국대사관을 통해 전달됐고 유해는 2017년 11월 화살머리고지 부근의 민간인출입통제선 지역에 안장됐다. 우리 교과서들은 가슴 저미는 이런 역사에 무덤덤하다. 2000여년 전 마사다 전투를 가르치는 이스라엘과는 달리 참전 노병들이 생존해 있는 한국에서는 60여년 전의 전쟁이 잊혀지고 있다. 그래서 유해 발굴을 바라보면서 노병들은 포연이 자욱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회한(悔恨)에 잠길 것이다.

그렇다면 유해 발굴을 바라보는 국민 모두는 6·25 역사를 되새기면서 옷깃을 여미고 대한민국을 수호하다 죽어간 국군 및 유엔군의 유해들이 속히 조국과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성원해야 한다. 그들을 정중히 모시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의무이며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래야 한다. 중국군과 북한군 유해도 정중한 예우 속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자(死者)는 더 이상 적군이 아니다. 이와 함께 유해 발굴을 계기로 왜 그토록 많은 한국과 외국의 젊은이가 화살머리고지에서 죽었는지를 후세들에게 가르쳐야 하고 6·25가 잊혀진 전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몸 바쳐 나라를 지킨 노병들을 위로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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