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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비서로, 외교관으로… '위대한 조선 어머니' 외친 진보 여성

[잊혀진 의인들] <10> 백범의 며느리 안미생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안중근 조카...베이징서 태어나

3년 연하 김구 장남 김인과 결혼

임정서 활동...영어·러시아에 능통

"조선 여성운동, 별개 단체 아닌

남성들과 함께 전개해야" 피력

"위대한 어머니가 큰인물 키워" 강조

남편 치료위해 페니실린 간청했지만

김구 "어떻게 아들만 살리나" 거절

해방후 귀국해 반탁운동에도 참여

"남편없는 곳서 살기싫다" 미국행

백범 서거때도 뉴욕서 조전만 보내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0년 전인 지난 1949년 6월26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주석이 대한민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백주에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김구 서거 70주기를 계기로 한국 독립운동계를 대변하는 대표적 두 가문, 안중근 가문과 김구 가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바로 안미생(安美生) 여사다.

1946년 경교장 앞에서의 백범 김구 선생과 안미생(뒤쪽)./사진제공=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안미생은 1914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천주교 세례명은 수잔(수잔나). 부친은 안중근의 아우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정근(安定根)이었고 오빠는 안원생, 동생은 안진생이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한때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지방 니콜스크 우수리스키(소왕령· 蘇王營)에서 잠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부친이 1919년께 중국 상하이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이후 독립운동을 하는 가족을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가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중국 칭화(淸華)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영어·러시아어에 능통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국민정부가 중국 서남부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세운 쿤밍서남연합대로 옮겨 졸업했다. 그는 1939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40년 충칭에서 김구의 장남 김인(金仁, 1917~1945)과 결혼했다. 3년 연상이었다.

1945년 3월29일, 해방을 불과 5개월 앞둔 때에 안미생의 연하남편 김인은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나이 만 27세였다. 어린 딸 효자가 만 4세였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독립당(상임위원), 재충칭 애국부인회 등에서 활동하다 남편 사망 이후 김구의 비서관으로 활동했고 1945년 11월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해 경교장에 거주했다.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과 함께 귀국했는데 여성으로서는 유일했다. 1947년 말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서 2004년에 향년 90세로 사망할 때까지 일리노이주 시카고 등지에 거주했다고 한다.

안미생 여사를 소개한 당시 신문 기사./자료제공=국사편찬위원회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 안미생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22일 수천여명의 청중이 운집한 서울 풍문여고 강당에서 열린 전국 부녀총동맹 결성대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축사를 했다. “ 8월15일 제2차 전쟁이 끝나고 왜놈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므로 우리 조선은 자유의 해방을 얻었으나 우리 부녀에 대해서는 이중 삼중으로 중한 날입니다. 여성은 과거 봉건주의제도와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해방을 한 것입니다. 조선 여성뿐 아니라 세계 여성이 함께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이 해방은 부녀에게 말하면 세계역사가 한 10여년 뛰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건국단계에 있어 우리 부녀의 책임은 중합니다. 그것은 한 나라가 잘 되려면 한 집안이 잘 돼야 하고 한 집안이 잘 되려면 부녀의 노력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23일) 안미생의 뛰어난 언변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진보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미생은 ‘자유신문’ 1946년 1월1일자 건국부녀동맹 맹원 고명자(高明子)와의 대담 ‘건국 도상 중대한 과제인 1,500만 여성의 나갈 길’에서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여성문제를 진보적 시각에서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그는 “여성운동을 여성들이 별개로 단체를 모아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중국에서는 무슨 운동에서나 남녀가 한데 뭉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보아서 조선의 여성운동도 남자의 정치운동에 한데 참가해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독자적 여성운동을 남성들과 함께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안미생은 한국의 여성교육, 특히 어머니 이정서(李貞瑞) 여사의 가정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저도 여성문제, 즉 조선의 어머니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상으로도 위대한 어머니라야만 위대한 아기를 기를 수 있고 큰 인물의 어머니는 반드시 위대한 어머니였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조선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조선말을 익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그렇게 애쓰시고 가르치시지 않았으면 저는 그곳에서 나서 자랐으니만큼 지금 하는 만큼도 우리나라 말을 못했을 겁니다.” (‘자유신문’, 1946년 1월1일)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김구, 안우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안미생(왼쪽 두번째)./사진제공=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940년 9월에 임시정부는 치장에서 충칭으로 자리를 옮겼다. 쓰촨성 충칭은 중국 서부의 분지도시로 양쯔강 연안 ‘3대 화로(火爐)’ 중 한 곳으로 알려질 정도로 덥기로 유명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 밀린 중국이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자 도시 규모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충칭의 공기는 매우 나빠졌다. 이에 고령의 독립운동가들이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이 많았다.

김인도 폐병을 앓기 시작했다. 안미생은 시아버지 김구를 찾아가 당시 폐병에 특효약으로 알려진 페니실린을 맞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폐병으로 죽어가는 다른 동지들도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데 아들이라고 특별히 대우할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후일 김구의 둘째 아들 김신은 이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형님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 볼 것은 페니실린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봉쇄로 물자수송이 어려워 페니실린을 구하기 힘들었고 가격도 매우 비쌌다. 형수는 아버지에게 페니실린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여기 와 있는 동지 중에 그 병을 앓다 죽은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내 아들만 살릴 수 있단 말이냐.’ 형수는 아버지의 매정한 대답에 마음속으로 원망했을 것이다.”

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보면서도 공과 사를 구분하고 엄격한 원칙을 고수하며 아들에 대한 특혜(?)를 거부한 김구.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서운 냉혈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처럼 철저한 원칙과 나름 대로의 기준을 지켰기 때문에 그 어려운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 김인과 자신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당한 며느리 안미생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아가 이들에게 아버지 김구는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또 독립운동이란, 조국이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의 혼탁한 현실에서 추상같은 공선사후(公先私後), 지도자의 엄격한 자기관리 및 집안 관리는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또 다른 가치와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김구의 맏며느리 안미생(뒷줄 왼쪽 다섯번째)이 1946년 시아버지인 김구(앞줄 왼쪽 세번째) 선생과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부부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안미생은 해방 이후 백범과 함께 귀국해 경교장에서 김구의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천주교 세례명 ‘안수잔(또는 수산나)’이라는 이름을 쓰며 반탁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1947년 9월(일설에는 1947년 말, 또는 1948년께)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이 없는 이 나라에 살기 싫다” “남편을 잃은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겹다”는 말을 주위에 남겼다고 한다. 이듬해 경교장에서 백범이 서거했을 때 뉴욕에서는 안수잔나 명의의 조전(弔電)만 날아왔을 뿐,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1960년대 중반쯤 안미생은 딸 김효자에게 연락해 미국 유학을 권했고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도미한 김효자도 이후 소식이 끊겼다.

1945년 3월29일 남편 김인이 중국 충칭에서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1949년 3월27일 부친 안정근마저 상하이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또 같은 해 6월26일에는 시아버지 김구마저 현역 육군장교에게 암살된 상황에서 안미생의 입장에서는 굳이 귀국해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미생에게 연락 두절은 어쩌면 과거를 기억하는, 어쩌면 망각하고 싶은 과거에 대한 또 하나의 독특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김구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한인 군대를 조직해 중국공산군과 싸우게 한다는 ‘만주 계획’을 1946년 하반기부터 구상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회담을 하려 했다. 이를 위해 며느리이자 비서인 안미생에게 메시지를 줘 1947년 9월 초 중국에 파견했다. 미군 정보당국은 안미생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을 통해 장제스를 만났을 것으로 파악했다. 실제로 안미생은 이때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등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안미생은 이때 미국으로 가서 귀국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미생이 갑자기 미국으로 가서 두문불출하게 된 배경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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