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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공무원 늘린다는데…노량진 공시촌 '기회의 문'인가 '희망 고문'인가

'취업절벽 탈출구' 41만명 몰려…올해 9급 응시생 2%만 합격

공무원 증원·과목 변경 예고에 학원가 "노후가 걱정…" 상혼도

학령인구 대비 과도한 쏠림…기업환경 개선 등 정책보완 시급

공무원시험의 메카 서울 노량진 학원의 강의실. 노량진 학원가는 다음주부터 오는 2020년 공시 시즌에 대비한 종합반을 일제히 개강을 한다. /연합뉴스






지난 주말 서울 노량진의 A 공무원시험(공시) 전문학원에서 열린 9급 시험 설명회. 7월 둘째 주 2020년 공시 대비반 강좌 개설을 앞두고 개최된 설명회에는 남녀 예비 수강생 100여명이 모였다. 1년 전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김모(29)씨도 그중 한 명이다. 공시에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 시험요? 그나마 가장 공정한 경쟁이죠. 지방대 문과생 꼬리표가 붙으면 대기업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거든요.” 김씨는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중소기업을 다니다 연초에 그만뒀다. 지난 4월과 6월 국가직과 지방직 9급 공채에 경험 삼아 응시한 뒤 이번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상경했다고 한다. “대학 동기의 70%쯤이 공시를 준비한다”는 그의 말에서는 공무원 되는 길이 기회의 문처럼 들렸다.

이날 설명회에 참가한 사람의 대부분이 2030세대였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층도 언뜻 보였다. 2009년 응시 나이 상한제가 폐지된 후 인생 2막을 공무원으로 출발하려는 늦깎이 공시생들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지난달 발표된 올해 국가직 9급 최종 합격자 가운데 4050세대는 3.5%(178명). 지원율은 합격률보다 다소 높은 5% 수준이다. 머릿수로 따지면 1만명을 훌쩍 넘는다.

유명 공무원 학원이 몰려 있는 노량진 공시촌 중심가.


여름방학이 겹치는 7월은 1월과 더불어 공시 학원가의 대목이다. 가장 많이 뽑는 국가·지방직 9급 공채가 끝나고 내년 시즌을 대비하는 출발점이어서다. 젊은 공시생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B 학원이 지난달 22일 실시한 설명회에는 1,000명이 넘는 신청자가 몰려 외부 강의실 2개를 빌려서 실황 중계를 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공시 열풍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학원가의 설명을 종합하면 1997년과 2008년 두 차례의 경제위기가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힘들게 스펙 쌓고 어렵게 직장을 잡아도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 다니면 도둑놈)’로 대표되는 세태 변화는 안정된 직업, 다시 말해 공무원에 대한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렸다는 것이다. ‘직장이 있으면 뭐 하겠노. 노후가 불안한데’라는 글귀를 담은 C학원의 홍보물은 이런 풍속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용이 저렴하고 학습하기 쉬운 ‘인강(인터넷강의)’의 영향도 크다. 젊은층에 익숙한 인강으로 명성을 얻은 외국어와 수능학원들이 노량진 공시시장에 대거 진출한 시기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다. 이들은 ‘일타(일등 스타)’ 강사를 앞세워 수십 년 전통을 자랑하는 터줏대감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노량진 일타 강사의 연봉은 40억~50억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무원의 직업 안정성을 부각시킨 노량진 공시 학원의 판촉물 겉표지




공시촌의 최대 이슈는 시험 과목 등 제도 변경. 인사혁신처는 지난달 말 2022년부터 국가직 9급 공채의 고교 과목(수학·과학·사회)을 없애고 직무 연관 과목을 신설했다. 2년 유예 기간을 둔다지만 공시생으로서는 조기 합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다. 지방직도 과목 변경이 예상되지만 아직 구체적인 방침이 없어 불안감은 더 크다고 한다. 국가직 응시생 열에 아홉은 지방직에 중복 응시하기 때문이다.

노량진 학원가는 이런 제도 변화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공무원 증원 계획도 학원가 마케팅에 날개를 달아줬다. ‘더 이상 이런 기회는 없다’는 노골적인 슬로건을 내건 학원도 있다. 공무원을 더 뽑아 경쟁률이 낮아지는 시점이니 제도 변경 이전에 끝내자는 상술이다. 학원가의 설명처럼 경쟁률이 낮아지는 추세이기는 하다. 국가직 9급 경쟁률은 10년 전 60~80대1 수준이었지만 지난해와 올해 40대1 정도로 낮아졌다. 시험 일정의 변화도 경쟁률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낳았다. 지난달 15일 치러진 지방직 9급 시험 결과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올해 경쟁률은 10.4대1로 지난해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이는 지난해까지 다른 시도와 다른 날에 시험을 보던 서울시가 올해부터 같은 날 시험을 치르는 바람에 응시자가 분산됐기 때문이다.



스펙 경쟁과 취업 절벽 앞에 절망한 청년들이 공시로 탈출구를 찾는다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바늘구멍에 가까운 ‘합격 절벽’에 맞닥뜨린다. 올해 국가직 9급에 응시한 19만5,322명 가운데 공무원증을 목에 건 공시생은 고작 4,987명으로 합격률이 2.5%에 그쳤다. 19만여명은 낙방의 고배를 마신 셈이다. 이 중 교육행정직의 합격률은 0.58%에 불과하다. 공시생들은 공무원 증원 효과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는 반응이다. 어차피 1~2점 차이로 당락을 가르는 ‘희망고문’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B 학원 옥상 휴게실에서 만난 4수생 이모(34)씨는 “2년 전부터 친구들과 연락이 끊겨 사회적으로 고립된 느낌이 든다”며 “합격선을 맴돌다 보니 재도전의 끈을 놓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노량진 공시촌의 명물 컵밥거리. 학원 중심가에서 변두리로 이전한 탓에 매출 감소로 문을 닫은 가게도 있다.


공시 쏠림현상은 자못 심각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추산하는 공시생은 41만명. 청년(15~29세)취업 준비생 10명 중 4명꼴이다. 학령인구 감소를 고려하면 공시생 규모가 수학능력시험 수험생 수를 추월하는 건 시간문제다. 한창 경제활동을 해야 할 젊은이들이 공시 준비에 열정을 몇 년씩 쏟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학술지에 게재된 ‘공시생 규모 추정 및 실태 연구’ 논문에 따르면 공시 준비 기간은 평균 24.2개월, 하루 평균 공부 시간은 8.7시간으로 파악됐다. 논문 저자 김향덕 건국대 박사는 “고교생이 대학을 가는 것처럼 대학생 사이에서 공시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 증원이 올바른 방향인지 의문”이라며 “공시 쏠림현상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더 늦기 전에 정책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년 전 공시생의 경제적 손실액(기회비용)을 17조원으로 추산한 오준범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공시생 증가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질 좋은 민간 일자리의 절대 부족에 있다”며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5분 만에 한 끼를 때우는 3,000원짜리 컵밥 청춘과 수십억 연봉의 일타 강사가 공존하는 노량진. 일자리 불임과 불안 시대를 낳고 ‘열정페이’를 강요한 우리 사회의 그늘진 단면이 아닐까.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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