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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읽기·종이 찢어 붙이기…미술관이 '개념'을 샀다

경기도미술관, 국내 국공립 최초 행위예술 소장

성능경 '신문읽기', 홍명섭 '종이 찢어 붙이기' 구입

세상 떠들썩했던 카텔란의 1억8,000만원 '바나나'는

구겐하임미술관에 보증서와 설명서로 '소장'돼

개념미술 시대의 결과보다 개념 자체, 과정 중요

작가 성능경이 1976년에 벌인 행위예술 ‘신문읽기 퍼포먼스’ /사진제공=경기도미술관




#1976년 서울 안국동의 서울화랑. ‘4인의 이벤트’라는 전시에 참여한 성능경 작가는 그림 대신 그날의 신문을 챙겨갔다. 전시장에 의자와 책상, 휴지통과 칼 등을 마련한 작가는 신문을 소리 내 읽은 후, 읽은 부분만을 면도칼로 오려내는 단순한 행동을 반복했다. 오려낸 부분은 휴지통 같은 청색 아크릴통에 넣고, 기사가 제거된 너덜너덜한 신문은 벽면에 붙여 전시했다. 다음 날이면 벽에 붙인 것들을 떼 낸 후 새로이 발행된 신문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 수행했다.

#1978년 대전문화원에서는 홍명섭 작가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역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잠시 스치듯 살다가는 것같은 생명 주기의 일시성(temporality)이 그의 화두였다. 그는 종이의 모서리를 일정한 각도·크기로 찢어낸 후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벽면에 붙였다. 그게 작품이었다. 찢어 붙인 종이는 전시가 끝난 후 폐기처분 됐다. “전시 후 작업 잔여물은 파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개념적 설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홍명섭의 1978년 행위예술 ‘de-veloping ; the wall’ /사진제공=경기도미술관


1970년대 국내 미술계에서는 개념미술의 일종이며 ‘이벤트’라 불린 퍼포먼스 형식의 행위예술이 현대미술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이뤘다. 오늘날 미술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일시적으로 시연되고 사라지는 특성상 그림·조각처럼 ‘소장품’을 남기기 쉽지 않다. 미술관은 이 같은 개념미술이나 행위예술을 어떻게 소장할까?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이 국내 국공립미술관 최초로 행위예술인 ‘퍼포먼스 분야’의 작품을 구입해 ‘2019년 신소장품전’ 형식으로 온라인 공개 중이다. 미술관 수장고로 들어간 ‘소장품’은 성능경이 잘라낸 신문도, 홍명섭이 찢어 붙였던 종이도 아니다. 당시 촬영 사진이 포함된 ‘매뉴얼(안내서)’뿐이다. 행위가 벌어지게 한 작가의 ‘개념’이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일부 공립미술관이 퍼포먼스에 사용된 오브제와 그 부산물, 관련 사진 등을 소장한 경우는 있으나 이처럼 개념 자체를 구입해 소장하기는 처음이다.



성 작가의 경우 대본(시놉시스) 없이 퍼포먼스 했지만, 이후로 지속적으로 ‘신문읽기’를 선보였기에 1990년대에 매뉴얼을 글로 정리·기록해 뒀다. 작가가 방점을 둔 작품 개념의 핵심은 ‘시연 당일의 신문’이라는 점. 작품이 원본성·영속성을 갖고 이후에도 시연될 수 있어야 하므로 반드시 작가 본인이 재연하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했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팀장은 “매뉴얼에 입각한 퍼포먼스의 오리지낼러티(원본성)이 중요한데 작가 본인이 ‘내가 시작했을 뿐이지 그 개념을 소장한 미술관이 실행권을 가지고 다른 미술가를 통해 개념을 이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면서 “만약 먼 훗날 종이신문이 사라져 전자신문으로 전환되는 등 매체 변화가 있는 경우에 관해서도 작가는 ‘종이신문 구입을 우선으로 하고, 없을 경우 그 시대의 언론이 존재할 테니 내용을 읽은 후 삭제하는 방식’으로 본질적 행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말했다. 작가와의 합의에 따라 행위예술을 에디션으로도 판매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갤러리 페로탱이 아트바젤마이애미에 참가해 선보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 /서울경제DB


해외 미술관에서는 우리보다 한발 앞서 ‘개념미술’을 받아들였다. 최근에는 구겐하임미술관이 이탈리아 출신 현대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1억8,000만원 짜리 작품 ‘코미디언’을 기증받아 소장하게 됐다. 지난해 연말 ‘아트바젤 마이애미’에 선보인 이 작품은 두꺼운 은색 테이프로 진짜 바나나를 벽에 붙여 놓아 화제였다. 작가가 15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라 주목받았고, 3개의 에디션을 가진 이 작품이 각 12만 달러에 2점이나 순식간에 팔려 화제였으며, 미국의 한 행위미술가가 “배가 고프다”면서 작품을 먹어버려 파란을 일으켰다. 이를 출품한 갤러리 페로탱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바나나를 새로 사다 붙여 설치하며 중요한 것은 바나나가 아니라 작가의 개념임을 새삼 강조했다. 구겐하임미술관이 기증받은 것 역시 바나나도, 테이프도 아니었다. 미술관에 입고된 것은 ‘진품 보증서’와 “땅에서 175㎝ 높이에 바나나를 설치하고 7~10일에 한번씩 교체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14장 짜리 설치 안내서가 전부였다.

안미희 경기도미술관 관장은 “경기도미술관은 퍼포먼스 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및 수집으로 이 분야의 의미있는 컬렉션을 구축할 것”이라며 “미술관의 설립취지와 정체성을 반영하는 우수한 소장품을 지속적으로 수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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