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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담] '토착왜구'도 어리둥절하게 변신한 文정부 대일외교

■윤경환의 국정농담(國政濃談)

박지원 '文·스가 선언' 제안하고 김진표도 스가 예방

文 "총리님, 특히 반갑다", 이낙연 "정상회담 하자"

"김정은도 도쿄 초청" 靑·민주당 日에 잇딴 러브콜

트럼프 시대 항일외교에서 바이든 시대 전략 급선회

북미대화 설득 위해 정치인들 뒤늦게 한일관계 챙겨

日 "강제징용 해결 우선"...양국 여론이 최대 걸림돌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지난해 우리 법원의 강제징용 노동자 손해배상 판결과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로 악화 일로를 걷던 한일관계가 조금씩 해빙 무드에 들어서고 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정보당국 수장으로는 이례적으로 공개 석상에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를 만나더니 국회의원들까지 잇따라 일본을 방문하며 구애에 나섰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여러 정상들이 있는 자리에서 스가 총리에게 “특히 반갑다”는 인사를 던졌고,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한일 정상 간 공동선언을 촉구했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일본과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나와도 ‘토착왜구’로 몰았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문 대통령이 ‘넓은 아량’으로 먼저 다가서고 있다’는 평가가 민주당 핵심 지지층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 임기 내에 북미대화를 성사시키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는 현 정부가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 전 일본과의 관계를 다급하게 개선하려고 외교 전략을 바꾼 것으로 분석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중국·북한 등에 대항하는 한미일 안보 축과 동맹을 중시하는 만큼 북미대화 설득에 앞서 이 제반 조건을 충족시키거나, 적어도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강제징용 판결 문제가 여전히 최대 걸림돌이기는 하지만, 일본 역시 바이든 정부에 동맹 강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점에 긍정적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는 진단도 나온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연합뉴스


박지원 ‘文-스가 선언’ 제안에... 스가 “한국이 계기 만들라”

우리 정부의 달라진 대일외교 기조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갑작스러운 방일에서부터 표출됐다. 그간 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 등 공무원들에게 사실상 ‘방임’했던 한일관계를 정치인들이 주도적으로 풀려고 나선 신호탄이 됐다.

박 원장은 지난 8일 일본을 방문해 10일 스가 총리를 직접 만났다. 박 원장은 이에 앞서 니카이 도시히로 일본 자민당 간사장,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 다키자와 히로아키 내각정보조사관 등을 만났다.

일본 언론들은 다음 날 현지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박 원장이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함께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같은 ‘문재인·스가 선언’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측의 사과 표명과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 발전에 대한 내용을 담은 선언이다.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를 향한 양국 국민의 협력을 언급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박 원장이 새 한일 공동선언에 내년 7월 개최될 예정인 도쿄올림픽의 성공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그러면서 “일본 정부 관계자가 선언에 의해 한일 간의 현안이 해결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현실적이지 않다”며 박 원장의 제안을 평가절하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아사히신문도 “일본 고위관계자가 ‘전 징용공(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의 일본식 표현)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새 한일 공동선언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스가 총리가 ‘징용 문제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양국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는 계기를 한국 측이 만들라’고 박 원장에게 다시 요구했다”며 “현시점에서는 새로운 선언의 검토에 난색을 보인 형태”라고 진단했다. 박 원장도 11일 연합뉴스를 통해 “(일본 언론이) 사실대로 썼다”고 인정했다.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 /연합뉴스


민주당 “김정은도 초청 의향”... 日 “김진표씨 개인 생각”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더불어민주당)이 이끄는 한일의원연맹 소속 여야 의원 7명도 지난 13일 스가 총리를 예방했다. 김 회장은 귀국 직전인 14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양국 간의 국민 감정을 호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교류와 협력의 문제들을 힘차게 추진해나가는 것이 현재의 과거사 갈등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얘기를 방일 기간 일본 측 인사들을 사적으로 만난 자리해서도 전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가급적이면 모든 한일 현안을 일괄 타결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것이 안 되면 징용 문제는 현 상태에서 더 악화하지 않도록 봉합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여전히 기존의 강경한 입장을 그대로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같은 날 김 회장 일행과 스가 총리 면담 소식을 전하면서 “이런 상태라면 (일본 정부가) ‘일중한(한중일) 정상회의’ 개최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요미우리에 따르면 스가 총리는 이 자리에서 “징용공(강제징용 노동자) 문제 등으로 일한(한일) 관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며 한국 측이 문제 해결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김 회장 일행에게 요청했다. 청와대와 민주당이 꺼낸 도쿄올림픽 협조 등의 카드만으로는 현 상황을 해결하기 힘들다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요미우리는 한국 정부가 올해 말 한중일 정상회의에 맞춰 한일 정상회담을 연 뒤 강제징용 소송 문제와 일본의 수출규제 등을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공동선언을 내놓고 싶어하는 것으로 일본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또 일본 외무성 간부의 말을 인용해 김 회장 일행의 방일에도 한국 측으로부터 아무런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면서 “우리(일본 정부)는 ‘제로(0)’ 답변을 했다”고 보도했다.

김 회장은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 관련 한국 법원의 일본 기업 자산매각 절차를 두고 “여러 기술적 이유로도 그렇게 단기간에 하기에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며 “그 문제는 청와대에 전달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18일에는 “북한이 동의한다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도쿄올림픽 기간 도쿄로 초청할 의향이 있다”고 언론에 밝혔지만, 교도통신은 일본 외무성 간부가 이 발언에 대해 “김진표씨 개인 생각”이라며 선을 그었다고 보도했다.



14일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文대통령 “스가 총리님, 특히 반갑습니다”

일본에 화해 메시지를 던진 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진표 회장 일행이 스가 총리를 만난 13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도쿄올림픽을 한일관계 개선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한일정상회담 추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대표는 “평창동계올림픽 등 역대 올림픽은 동북아시아 평화와 번영에 크게 공헌해왔다”며 도쿄올림픽 성공은 한일관계 개선이 필수이며 북한과의 협조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가 총리가 의지만 갖고 있다면 문제를 풀 만한 지혜는 실무 선에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상태라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같은 날 오전에 열린 제28차 한일포럼 기조연설에서도 “한일 양국 정상이 만나 문제를 해결하고 촉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7일에는 일본기업 자산 현금화 문제를 두고 “한일 양국이 대화를 이어오고 있으며 분위기도 개선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도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연내 한일정상회담이 열리면 역사 문제를 매듭짓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정립해나가는 한일 ‘신시대선언 2020’을 채택할 수도 있다”며 “내년 도쿄올림픽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지친 전 세계인을 위로하는 행사가 되려면 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역사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보다 더 강한 ‘일본 러브콜’은 문 대통령에게서 나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아세안+3’ 화상 정상회의에서 “존경하는 의장님, 각국 정상 여러분”이라고 운을 뗀 뒤 “특히 일본의 스가 총리님이 반갑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스가 총리의 이름만 직접 거론하면서 베트남·태국 등 아세안 10개국 정상, 리커창 중국 총리에 비해 훨씬 각별한 의미를 담은 인사를 건넨 것이다. 문 대통령은 또 같은 날 화상으로 열린 제15차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도쿄올릭핌을 대화 재개의 모멘텀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연합뉴스


북미대화 위해 한일관계부터 개선 필요... 日도 바이든 의식

청와대와 여당이 이렇게 180도 달라진 대일외교에 매달리는 것은 바이든 시대에 맞춰 한미일 공조체계를 미리 구축하거나, 최소한 그에 상응하는 성의 표시를 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바이든 당선인이 한미관계뿐 아니라 한미일 안보동맹을 포함한 다자협력체제를 중요시하는 만큼 북미대화 협상판을 끌어내기 위해 그가 원하는 국제관계 조건에 먼저 맞춰 줘야 한다는 인식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동맹의 가치를 낮게 본 트럼프 시대에는 한일이 크게 화합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애초부터 분쟁 자체가 양국의 정치적인 이유에서 촉발된 만큼 그 매듭을 공무원이 아닌 정치인이 풀어야 한다는 지적은 그간 전문가들 사이에서 수도 없이 제기된 바 있다. 그 제안이 결국 바이든의 당선을 계기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실제로 정치인이 아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13일 SBS ‘8뉴스’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박지원 원장과 민주당이 일본 측에 제안한 ‘도쿄올림픽 계기의 한일 정상 간 협의’ 안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협의된 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청와대와 민주당의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그간 양국 사이에 쌓인 앙금이 이미 너무 깊어 한일 관계가 단기간에 회복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만만찮게 나온다. 스가 총리 역시 정치인인 만큼 일본 국민들의 정서를 달래줄 ‘선물’을 받기까지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물론 그 선물은 강제징용 판결과 기업 자산 현금화에 대한 우리 측의 어떤 ‘양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당장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한중일 정상회담 연내 개최도 힘들 것이란 분석이 곳곳에서 나온다. 청와대의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다만 기대할 지점은 스가 총리 역시 내년 1월20일 바이든 당선인 취임 전까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한일관계를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이다. 양국 모두 실익이 없는 다툼을 그만 멈추고 싶어 하는 눈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두 나라가 여론을 어떻게 추스르느냐가 변수로 남았을 뿐이다. 양국이 자발적인 우호 관계 설정에 실패한다면 오바마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개입 때처럼 바이든 정부도 물밑에서 양국 관계에 관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우리 정부가 원하는 문 대통령 임기 내 북미대화 재개는 더 후순위로 밀릴 위험이 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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