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8> 외국인투자 차별 없지만 우대도 중단..中시장 경쟁 치열해질듯
국제 경제·마켓 2019.03.19 17:35:03지난 15일 폐막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마지막 날 ‘외상투자법(외국인투자법)’을 통과시키면서 중국의 외국인투자관리제도가 선진국 수준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독소조항이 일부 있고 특히 미중 무역전쟁에 떠밀려 급조된 법률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동안 불분명했던 투자규정들이 상당히 정비된 것도 사실이다. 이번 법 제정을 계기로 중국이 외국인 투자에 대한 우대를 줄이는 대신 차별 또한 없애게 됨에 따라 중국시장을 두고 외국 기업과 중국 기업 간 경쟁은 점차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시장에 사활이 걸려 있기도 한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보다 면밀히 중국의 법률과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40년 만에 바뀐 외국인투자법=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하고 지난 1980년대 전후부터 잇따라 외국인 투자 관련 법률을 제정해왔다. 1979년 시행된 중외합자경영기업법을 비롯해 1986년에 나온 외자기업법, 1988년 중외합작경영기업법 등 이른바 ‘외자 3법’이 대표적이다. 이후 21세기 들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시대변화에 맞춰 기존 외자 3법을 대체할 새로운 외국인투자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됐지만 중국 내에서 별다른 동력을 얻지는 못했다. 기존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 중국에 이익이 됐고 특별히 불편함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가 투자와 소비, 수출의 3대 엔진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외국인 투자는 급속한 경제성장의 핵심 중에 핵심이었다. 문제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2015년 1,300억달러선을 정점으로 정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잉부채로 금융 리스크가 커지면서 2015년부터 중국 정부가 디레버리징(부채축소)에 나섰는데 공교롭게도 소비감소가 겹치면서 경기둔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급격한 임금상승이나 환경오염, 중국 기업과의 경쟁격화 등으로 외국 기업들에는 중국이 더 이상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게 된 셈이다. 중국 정부가 외국인투자법 개정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나선 것은 2015년의 일이다. 중국 상무부 주도로 ‘외국(外國)투자법’이라는 이름의 개정안이 제안됐다. 당시 외국투자법은 모두 11장 170조의 방대한 분량이었다. 하지만 관련 규정을 모두 고치려는 과욕이 역효과를 불렀다. 다른 기관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가운데 당시 이 법률은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중국 정부는 2016년 무려 4조위안의 경기부양책을 제시하는 등 성장세를 견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외국인 투자 감소에 따른 타격은 컸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지난해 발생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무역전쟁을 수습하고 중국 경제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명목상으로라도 개방확대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먼지가 쌓인 채 캐비닛에서 잠자던 2015년 ‘외국투자법’이 다시 수면 위로 나와 지난해 12월 ‘외상(外商)투자법’으로 수정안이 제안됐다. 무역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기대하며 만들어진 외상투자법은 불과 3개월여 만에 초고속으로 입법이 완료됐다. ◇무슨 내용이 담겼나=외상투자법은 내·외국인 동등대우 원칙 하에 외국인 투자기업의 지식재산권 보호, 기술이전 강요 금지, 금융거래 자율권보장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존 ‘외자 3법’인 중외합자경영기업법·외자기업법·중외합작경영기업법을 통합했다. 외자 3법은 폐지된다. 기존 외자 3법이 ‘심사허가’를 준 후 외국인 투자를 ‘우대’하는 정책이었다면 이번 법률은 ‘내국인·외국인 동등대우’ 원칙을 강조했다. 과거 명목상으로 우대한다면서 기술이전 강요 등 실질적으로 차별했다면 앞으로는 우대도 없지만 차별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법안 22조에는 ‘지식재산권 보호 및 강제기술이전 금지’ 규정이 담겼다. 이 조항은 이번에 급히 이 법률이 제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동안 중국에서 안 됐던 것이 명문화됐다는 의미가 있다. 25조의 ‘지방정부의 약속 이행 강화’ 조항도 중요하다. 외국 기업, 특히 한국 기업의 경우 인허가권을 가진 지방정부의 우대혜택을 믿고 투자한 경우가 많았다. 투자유치 후 지방정부의 책임자가 바뀔 경우 후임자가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을 분명히 한 것이다. 15·16조에서는 외국인 투자기업이 중국 산업표준 제정업무에 공평하게 참여하며 정부조달 업무에서 중국 기업과 평등하게 대우를 받도록 했다. 21조에서 외국인투자가의 소득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고 하는데 여전히 외환이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세부규정이 나올지 주목된다. 26조에는 ‘외국투자인기업의 민원처리’에 대해 규정했다. 외국인투자가가 합법적 권익이 침해받았을 경우 민원처리시스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중국 기업의 경우 이런 규정이 다른 법에 없어 역차별 주장이 중국업계에서 나오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외자정보보고제도와 안전심사제도를 다루는 34·35조에 문제를 제기한다. 외국인 투자기업은 기업등록시스템과 기업신용정보공시시스템에 기업투자정보를 보고하도록 의무화했으며, 특히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에 대해서는 안전심사를 하도록 규정했다. 중국에서는 안보 분야가 아주 광범위하게 해석되는데 이번 명문화가 기업활동을 더 옥죌 가능성도 있다. 40조는 미중 무역전쟁 때문에 특별히 삽입됐다고 한다. 향후 무역분쟁에서 보복을 하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외국 기업 불만 요인 여전…韓도 리스크 관리 필요=외상투자법은 모두 6장 42조로 당초 외국투자법에 비해 내용이 대폭 줄어들었다. 베이징다청법률사무소의 퉈웨이 변호사는 “과거 외국투자법은 거의 모두를 망라하면서 사실상 졸속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며 “이번에 만든 외상투자법이 법률로서는 완결성이 있다”고 말했다. 퉈 변호사는 다만 “간접투자 등 이번 외상투자법에 들어가지 못한 내용이 많아 장기적으로는 보다 확대된 ‘외국투자법’으로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외국 기업들의 반응도 곱지 않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주중 미국상공회의소는 “새 법안을 환영하지만 법안의 조항들이 매우 일반적이며 구체적이지 않다”며 “이토록 중요하고 광범위한 법안이 이해당사자의 충분한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발의된 것을 우려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35조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이 조항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국가 보안과 관련해 필요할 경우 외국인 투자를 심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앞서 주중 유럽연합(EU) 상의도 외상투자법이 미중 무역협상과 올해 전인대 일정 사이에 끼여 급조됐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도 내용이 간략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이번에 입법된 외상투자법이 외국인 투자 유치 관련 ‘기본법’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이 법률에서는 원칙만 정리하고 세부 사항은 각 부처의 규정이나 지방정부 조례를 통해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KOTRA 베이징무역관의 김윤희 박사는 “외상투자법은 큰 틀의 원칙적인 규정이기 때문에 실행을 위해서는 국무원 각 부처와 지방정부 등 현장에서의 ‘집행’이 중요할 것”이라며 “내년 1월 시행에 맞춰 우리 기업들도 중국 정부의 정책변화 흐름, 동향 등을 잘 숙지해 경영전략 전반에 반영하는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베이징특파원 chsm@@sedaily.com -
中, 돈 보다 싸우는 군대로…한반도 '안보 트리거' 되나
국제 정치·사회 2019.03.12 17:36:19중국이 해군 창설 70주년을 기념해 다음달 23일 산둥성 칭다오에서 중국 해군 사상 최대의 관함식을 열기로 했다. 지난 2009년에 열린 60주년 기념 관함식에는 세계 14개국, 군함 21척이 참가했지만 올해는 이를 훨씬 능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도 자국의 최신예 군함을 총출동시켜 ‘군사 굴기’를 과시할 계획이다. 중국이 처음으로 건조한 항모 랴오닝함과 국산 기술로 만든 두 번째 항모 001A함, 미사일 구축함 ‘055형’, 강습상륙함 ‘075형’, 핵잠수함 ‘094형’ 등을 관함식에서 선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경제 분야에서는 대미 유화책을 잇따라 내면서도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확보하겠다는 ‘강군몽(强軍夢)’ 목표는 잊지 않았다는 의지다. 미국 등 서방의 경계심을 낮추려는 시도도 병행되고 있기는 하다. 앞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장예쑤이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중국 국방비는 국내총생산(GDP)의 1.3%에 불과해 다른 선진국의 2% 이상과 큰 차이가 있다”며 “이런 제한적 국방비는 국가 주권과 안정, 영토 보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으로, 다른 국가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의 올해 국방예산은 전년 대비 7.5% 늘어난 1조1,900억위안(약 199조8,000억원)으로 책정됐다. 지난해에 비하면 0.6%포인트 줄어든 증가율이다. 하지만 중국의 군사력을 단순한 국방비 숫자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일반에 공개된 중국 국방예산에는 외국산 무기 획득비용과 연구개발(R&D)비 등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미 국방정보국(DIA)이 최근 발간한 ‘중국의 군사력 보고서’는 지난해 중국의 공식 국방비가 GDP의 1.3% 수준인 1,704억달러였다면서도 실제로는 2,000억달러를 넘었을 것이라는 분석을 포함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중국군 산하 인민무장경찰 등 준군사조직을 포함할 경우 2017년 중국의 국방비가 GDP의 2%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문제는 중국이 어떤 전투력을 갖고 있고 어떤 목표로 준비하느냐다. 시진핑 정부 들어 중국군은 ‘돈놀이하는 군대’에서 ‘싸우는 군대’로 변모하고 있다. 당장 미국에 맞서기는 어렵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 오는 2049년까지는 ‘강군몽’을 실현한다는 목표다. 앞서 장 대변인이 중국군의 예산으로 ‘국방비’라는 표현을 썼지만 중국의 군대는 ‘국군’이 아니다. 공산당 소속의 ‘당군’이다. 이름도 인민해방군이다. 중국군의 상징을 보면 ‘8·1(八·一)’이라는 표지가 많다. 이는 1927년 8월1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봉기가 장시성 난창에서 일어난 날을 의미하는 숫자다. 그해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고 공산당이 불법화된 데 대한 저항이었다. 공산당 군은 처음에는 난창 점령 등에 일시적으로 성공하지만 얼마 못 가 국민당 군대에 밀려 흩어졌다. 난창봉기와 함께 장시성과 후난성 등에서도 산발적인 봉기가 일어나지만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이후 후난성에서 봉기한 마오쩌둥 등이 장시성 징강산으로 이동하면서 ‘홍군의 전설’이 시작됐다. 이후 홍군은 △장정 △제2차 국공합작 △중일전쟁 등의 사건을 겪고 마지막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인민해방군이라는 이름은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에 붙여졌다. ‘8·1’은 곧 공산당이 처음 군사행동을 시작한 난창봉기를 중국군(인민해방군) 건군일로 여긴다는 뜻인 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에도 군은 여전히 국군이 아닌 당군이었다. 이는 홍군의 건설자이기도 한 마오쩌둥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지금도 인민해방군은 국가조직인 국무원이나 국회 격인 전인대가 아니라 공산당에 소속돼 있다. 시진핑은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격으로 군을 지휘한다. 한국은 지정학적 위치상 중국의 대외 팽창 시 그 길목에 놓여 있다. 중국군이 1949년 건국 이후 첫 전쟁을 한반도에서 진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은 북한을 돕되 미국에 직접 맞선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했지만 동북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이웃 나라 분쟁 개입에 다름 아니었다. 중국이 최근까지 치른 마지막 전투는 1979년 베트남전이다. 일반적으로는 무승부로 인식되지만 사실상 중국이 진 싸움이었다. 당시 중국군은 숫자만 많았을 뿐 장비나 보급·훈련은 베트남보다 한 수 아래였다. 문화대혁명 와중에 정치에 개입한 중국군은 군기이완이 만연했다. 베트남 같은 작은 나라에 패했을 리 없다는 중국 특유의 ‘체면 차리기’는 이후 중국군의 재편을 방해하는 요인이 됐다. 베트남전 참전 직후에 본격화한 개혁개방도 군사 문제를 정치가들의 관심에서 떼어놓았다. 물론 애초에는 소련, 이후에는 미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면서 중국의 군사력은 급속도로 강화됐다. 하지만 기본적인 모순이 있었다. 반란군으로 출발한 홍군에는 자급자족하는 전통이 있었다. 건국 이후에도 별도의 예산운용이 진행됐다. 즉 군이 직접 기업을 운영하면서 재정을 조달한 것이다. 당연히 군이 하는 사업은 독점사업이었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수익이 늘어나고 비리도 증가했다. 군인들이 전투훈련은 받지 않고 돈벌이에만 몰두한 것이다. 군사력 개편이 시작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후진타오 전 정부 때부터 군 소속 회사들을 민간으로 옮기고, 특히 시진핑 정권 들어서는 군 소유의 모든 기업을 청산하고 민간과의 기존 계약 연장도 불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싸워서 이기는 군대’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전투형 군대가 말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훈련을 강화하든지 아니면 마치 곧 전쟁이 곧 일어날 것처럼 긴박감을 불어넣어야 한다. 중국이 미국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나 남중국해, 때로는 황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것은 군 기강 잡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올해 초에도 대만에 대한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군 개혁은 2016년에 진행됐다. 기존 내부반란 진압 위주의 7개 군구(軍區)를 새롭게 동·서·남·북·중부 등 5개의 전구(戰區)로 개편하고, 18개 집단군 가운데 5개를 해체하고 13개만 남겼다. 그러면서 기존 230만명이던 병력을 200만명으로 축소했다. 전구나 집단군의 모든 지휘명령은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게 집중된다. 전구사령부는 육해공군을 포괄한다. 한반도와 연관된 전구는 동북3성과 산둥성을 관할하는 북부전구다. 여기에는 78(사령부 지린성 창춘), 79(〃랴오닝성 랴오양), 80(〃산둥성 웨이팡) 집단군으로, 병력 17만명의 지상군을 포함해 공군·북해함대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북한 급변사태 등에 바로 투입될 수 있다. 다음달 국제관함식이 열리는 칭다오는 한반도를 겨냥한 북해함대의 모항이다. 첨단무기도 속속 갖추고 있다. 미 본토를 직접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00여기를 포함해 사정거리 1,000~1만㎞의 둥펑 미사일은 위협적이다. 현재 항공모함 2척을 건조했고 2035년까지 총 5척의 항모 배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에 버금가는 S-400 방공 시스템도 러시아로부터 대거 도입했다. 한국의 사드는 경상북도 내륙에 배치돼 있지만 S-400 포대는 한반도가 바로 마주 보이는 산둥반도에 놓일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시진핑 정부가 앞세우는 중국몽을 위해서는 결국 미국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중국이 미국과 노골적인 군비경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수뇌부는 빈약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 계획 등 미국과 군비경쟁을 하다가 결국 해체된 구소련의 운명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중국 당국자들이 말끝마다 “평화발전을 추구하고 헤게모니 쟁탈에 반대한다”고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신 중국은 첨단기술 개발에 열을 올린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위성항법시스템(GPS)과 같은 ‘베이더우’ 시스템이다. 내년까지 35개 위성으로 구성된 베이더우 시스템이 완성된다. GPS가 군사용으로 처음 개발된 것처럼 중국의 베이더우 역시 군사정보위성이다. 베이더우 위성을 쏘아 올리는 로켓은 곧바로 ICBM으로 전용할 수 있다. 항공모함이나 스텔스기 개발에 열중하는 것도 우선 첨단군사 기술에서는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욕심에서 나왔다. 미중 무역전쟁의 쟁점 중 하나인 기술 절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야가 군사기술이다. 중국에서는 시진핑 집권 이후 ‘강한-성당(强漢-盛唐)’ 시대를 재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조이자 한족이 세운 왕조였다. 이런 시대를 만드는 것이 바로 중국몽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향후 미국과 중국의 충돌 가능성을 논하기 전에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과거 한나라와 당나라는 모두 세계 지배에 나서기에 앞서 한국과 충돌했다.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 고대조선을 멸망시켰고 당나라는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을 방해했다. 앞서 언급한 1950년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이런 역사의 반복이었던 셈이다. 중국의 군사력 동향에 특히 유의해야 하는 이유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
[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6> 최대 정치행사 양회의 시작…‘제도’ 아닌 ‘숫자’에 갇힌 관심들
국제 정치·사회 2019.03.02 09:00:11일요일인 3일부터 중국의 연중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가 베이징에서 열린다. 3월 한달 동안 전국인민대표대회(약칭 전인대)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약칭 정협) 등 2개 행사가 함께 열리는데 이를 통칭해 양회라고 부른다. 전인대와 정협은 1년에 딱 한번 봄에 전체가 모인다. 그래서 연중 최대 행사가 된다. 전인대는 우리로 하면 국회에 해당된다. 반면 정협은 중국만의 독특한 시스템이다. 이런 복잡한 정치과정이 필요한 데는 곤란했던 중국의 역사가 숨어 있다. 물론 중국에도 제대로 된 의회제도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13년의 일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라는 공화제를 선택한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의회를 꾸리기 위한 선거를 한다. 1912년 12월과 1913년 1월 2단계 선거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식 ‘국회’를 구성했다. 양원으로 이뤄졌는데 정원은 하원 격인 중의원 의원이 596명, 상원인 참의원은 274명이었다. 시대적 상황에 맞게 보통선거는 아니고 제한선거였다. 우리나라도 보통선거가 1948년에 처음 실시 됐으니 앞서 수십년 전 중국의 제한선거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는 제정에서 벗어나 공화정을 처음 받아들였고 의회는 대부분에게 익숙한 제도는 아니었다. 중국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1912년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선거구에 2년 이상 거주하고 직접세를 ‘2원’ 이상 납부하거나 ‘500원’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소학년 졸업이상의 학력이 있는 21세 이상의 남성이었다고 한다. 이런 자격을 만족하는 사람은 당시 중국 인구의 10% 정도였다 . 선거과정은 더 논란이 됐다. 아직 선거가 뭔지, 의회라는 대표기구가 왜 필요한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온갖 불법이 난무했다. 국회의원이 되는 데 수백만원이 드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한다. 광활한 영토에서의 동시선거의 어려움, 근대문명에 대한 무지, 귀족계급의 폭주 등으로 중국의 의회제는 시작부터 토대가 흔들렸다. 어쨌든 이 선거에서 과반을 장악한 것은 국민당이다. 국민당의 지도자 쑹자오런이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당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황제의 꿈을 꾸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국회의 간섭이 불만이었다. 곧바로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회를 해산한다. 이후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퇴위하고 곧 사망한다. 그나마 힘으로 중국을 묶고 있던 위안스카이라는 벽이 1916년 무너지면서 중국은 사분오열, 즉 군벌내전에 휘말린다. 국회는 중국 안을 떠돌며 명맥을 유지했지만 군벌정권의 거수기에 불과했고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각 지역에 할거하던 군벌을 꺾고 중국을 재통일한 것이 바로 장제스의 국민당이다. 하지만 이미 중국에서 의회제도는 신뢰를 잃었다. 국민당도 이후 대만으로 쫓겨갈 때까지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의회도 없이 정치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국민당이나 공산당, 기타 제3세력 등 혁명가들이 이끄는 집단들이 충돌했다. 국민당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비난을 받았다. 무력으로 반대세력을 눌렀지만 이에 반발하는 제3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장제스가 결국 중국에서 실패한 이유다. 반면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공산당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제3세력들은 공산당을 적극적, 또는 암묵적으로 지지했다. 당시에 민주제당파(民主諸黨派)라고 불린 그들이다. 보통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중국민주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치공당, 대만민주동맹, 구삼학사 등 8개 정당이다. 공산당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이들 민주제당파는 중요한 작용을 했다. 민주제당파는 군사적으로는 별볼일 없었지만 이들은 지지는 중국인들의 ‘민심’이 공산당을 지지했다고 해석됐다. 공산당식으로 이야기하면 ‘통일전선전술’이 통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앞두고 공산당과 민주제당파들이 모여서 회의를 연 것이 바로 ‘정협’의 시작이다. 정협은 1949년 9월21일 베이징에서 1차회의를 연다. 여기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조직법’ 등 조직대강이 만들어졌다. 실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선포는 열흘 뒤인 10월1일이다. 그 이후 70년 동안 공산당이 민주제당파의 협조 아래 중국을 통치하고 한다는 골격이 완성됐다. 물론 민주제당파는 이후 마오쩌둥이 권력을 강화하면서 힘을 잃고 형해화된다. 한국이나 서구 국가들의 국회와 같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린 것은 1954년이다. 형식상으로 이 전인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통과됐다. 이후 1959년 전인대와 정협이 같은 시기에 개최되며 ‘양회’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는 양회가 현재처럼 3월에 개최되는 것이 관례가 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여유로 현재까지 정협과 전인대가 동거하는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대표성도 다르다. 정협은 기존 민주제당파 외에 현재는 총공회·부녀회 등 사회조직, 문화계·경제계 직업조직 등이 참가하는 데 쉽게 말하면 직능대표들의 자문기구에 가깝다. 유명 기업가나 연예인들도 주로 정협 위원이다. 반면 전인대는 다른 나라의 국회처럼 지역 대표로 구성된 의결기구다. 구성원은 정협이 ‘위원’으로, 전인대는 ‘대표’로 호칭한다. 물론 당연히 전인대 대표나 정협 위원 모두 공산당원이거나 공산당에서 승인한 인물들이다. 선출의 위한 기본 자격은 능력과 전문성 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한다. 국가는 즉 당국가 체제를 말한다. 충성심이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다. 때문에 대놓고 공산당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당연히 양회는 지방정부에서도 같은 구조의 조직을 갖고 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공산당과 민주제당파가 합친 “연합정부”(마오쩌둥의 말)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정협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올해 양회는 3월3일에 열린다. 세부적으로 정협이 3월3일 시작되고 전인대는 이틀 뒤인 5일 개막한다. 정협이 먼저 열리는 것은 전인대에 보고할 각종 자료를 먼저 정협에서 검토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모든 결론은 의결기구인 전인대에서 나오지만 정협은 존재 자체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전인대와 정협의 회기, 즉 대표들의 임기는 5년이다. 이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임기 5년과 같다. 양회는 매년 개최되는 데 반해 공산당 당대회는 5년에 한번 열린다. 당국가 체제에 따라 공산당이 10월에 당대회를 진행해서 정책방향이나 대표를 뽑고 나면 그 다음해 3월에 전인대가 새로 시작되면서 이를 추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따라 5년 임기 첫해의 양회가 중요하다. 현 전인대는 지난 2018년 임기를 시작했으니 올해는 2차 회의를 갖는 셈이다. 공산당은 5년 단위로 당대회를 하니 임기 첫 해를 빼고 4년간은 공산당 당대회 없이 양회만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양회가 중국 최대의 정치행사라고 하는 이유다. 즉 5년 중에 1년은 공산당 당대회가 최대 정치행사다. 매년 양회에는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양회에서 발표되는 ‘숫자’ 때문이다. 지난해 양회에서는 나름대로 정부 인사 등 굵직한 발표들이 많았다. 헌법 수정을 통해 국가주석 연임제한을 철폐하고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도 지난해 전인대에서다. 상대적으로 2년차부터는 역할이 적다. 내외신 들은 올해 양회가 경제문제에 집중할 것으로 보고 있다. 양회의 하이라이트는 5일 전인대 개막날에 공개되는 ‘정부공작(업무)보고’다. 보통 국무원 총리(현재 리커창)이 발표한다. 그 해의 거시경제 운용방안을 결정하고 예산안을 확정한다.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경제성장률 목표치가 이날 5일 나온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관심이 집중된다. 앞서 지방양회를 통해 주요 도시들은 올해 성장률을 줄줄이 낮추며 올해 경기둔화를 기정사실화 했다. 중국내 매체에 따르면 베이징과 광저우는 올해 성장률 목표치를 6.0~6.5%의 구간으로 설정했다. 이는 지난해 목표치인 베이징 7.5%, 광저우 6.5%보다 낮아진 수치다. 선전 역시 성장률 목표치를 ‘7% 내외’로 제시해 지난해 ‘8% 이상’보다 낮췄다. 지난해 전인대는 그 해 경제성장 목표치를 ‘6.5% 안팎’으로 제시했고 실제 경제는 6.6% 성장했다. 올해 전인대는 6%대 초반의 목표치를 제시할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현재 진행중인 미중 무역전쟁이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된다는 전망에서 가능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지역과 직능을 대표하며 정교하게 짜여진 것 같지만 실제 정협이나 전인대 모두 공산당의 결정을 승인하는 고무도장,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국 정부는 전년 말이나 당해 초에 각종 정책을 확정해 양회로 넘긴다. 양회, 최종적으로는 전인대가 국가의 최고의결기구이기 때문이다. 현재 양회 제도와 시스템 자체에 대한 반대는 중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반대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 같은 거대한 나라에서 한국이나 서구식의 의회선거는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자포자기도 있다. ‘1913년 국회’의 실패가 100년 이상 악영향을 미친다고 할까. 해외에서도 제도 자체를 폄하 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다. 중동의 왕정, 북한 같은 1인지배 국가가 있는 상황에서 중국 제도를 마냥 비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지난해 전인대는 헌법을 개정해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폐기해 시 주석의 장기집권 길을 열었다. 당시 표결에서는 총 2,964표 가운데 찬성이 2,958표였다. 이중 반대는 0.0007%인 2표에 머물렀다. 이외에 기권 3표, 무효 1표였다. 흥미 있는 것은 반대 2표는 중국의 지금 현실에서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일 텐데 당시 정부나 어느 매체도 누가 그랬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혹자는 반대가 아예 없을 것은 걱정한 중국 당국의 ‘짜맞추기’라는 해석도 나왔다. 당시 개헌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의 종신집권은 개인독재로 흘렀고, 중국을 암흑시대로 몰아넣었다”는 작가 라오구이의 공개성명이나 웨이보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비판이 있었지만 곧 방송과 신문 등 관변매체의 압도적인 찬성 목소리에 휩쓸렸었다. 참고로 용어를 정리한다면 중국은 공산당의 당대회를 전국대표대회라고 부르고 우리의 국회 같은 국가 단위는 여기에 ‘인민’을 붙여 전국인민대표대회라고 한다. 일개 당 행사에 전국대표대회라고 한 것은 쑨원이 국민당을 개조하면서 시작됐다. 쑨원은 자신들이 중국을 대표한다면서 국민당이 그냥 ‘전국대표대회’를 연다고 했고 이후 공산당도 그대로 따랐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
'마윈의 마법' 中 알리페이가 성공할수밖에 없는 이유
국제 경제·마켓 2019.02.24 09:00:01“신용카드는 부자를 위한 것이고, 모바일결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회장 마윈이 지난 1월 24일 다보스 포럼에서 이른바 ‘신유통’에 대해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알리바바가 모바일결제 업체인 알리페이를 운영하고 자사의 전자상거래도 대개 모바일결제로 되고 있으니 나름대로 자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마윈의 자신감은 적어도 중국에서는 모바일결제가 신용카드를 이겼다는 결과론에서 나왔다. 중국에서 신용카드사들은 수십년 동안 마케팅을 해왔지만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모바일결제는 10년 만에 중국 유통시장을 제패했다. 현재 모바일결제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은 중국에서 기본적인 생활조차도 어렵다. 최근 한국에도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들이 ‘제로페이’ 등 모바일결제를 도입하거나 준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향이 크다. 중국인들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데에 모바일 결제가 도움이 됐다는 가설이다. 쉽고 간편한 모바일결제가 소비를 늘리고 소비자나 판매자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희망에서다. 다만 중국의 사례가 다른 모든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따른 독특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모바일결제의 시작은 난 2003년에 나온 알리바바의 알리페이(중국명 즈푸바오·支付寶)로 평가된다. 알리페이는 처음 전자상거래를 위한 지불수단으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다양한 분야에도 적용됐다. 특히 2010년대 초부터 모바일결제 시장이 크게 확산된다. 이른바 온·오프라인 연계서비스(O2O·Online to Offline)가 중국에서 급속히 보급되면서 이를 위해 모바일결제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택시호출 어플리케이션인 ‘디디추싱’의 대중화가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일반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에 서 있기 보다 스마트폰의 디디추싱앱을 사용해 택시를 부르면 훨씬 편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요금을 지불할 때도 디디추싱과 연동된 모바일결제를 사용하면 된다. 이것이 얼마나 편한지는 중국에서 한번 해본 사람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후 음식배달·공유자전거 등 새로운 O20서비스가 등장할 때마다 모두 모바일결제를 사용했다. 또 알리바바와 함께 징둥, 쑤닝 등을 통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전자상거래도 모바일결제 규모를 키웠다. 이후 일반 오프라인 매장들도 받아들이면서 모바일결제가 대세가 됐다. 현재 중국 모바일결제 시장은 알리바바의 알리페이가 50%, 텐센트의 위챗페이(중국명 웨이신즈푸·微信支付)가 4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방송 등 매체들도 모바일결제 확산이 한몫한다. 중국 방송에서는 대개 스폰서 기업이 붙는다. 예를 들면 지난 설날(중국은 춘제)때 방송된 중국중앙방송(CCTV)의 춘완(춘제롄환완후이·春節聯歡晩會) 프로그램에서 후원사인 바이두는 생방송 중에 앱을 통해 10억위안(약 1,650억원)의 홍빠오(중국식 세뱃돈)을 뿌렸다. 지난 2016년 춘완에서 알리바바가 뿌린 돈 2억위안 보다 무려 5배가 늘어난 수치다. 시청자들이 방송을 보다가 재수 좋게 이런 돈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바이두앱에 연결된 모바일결제가 가능해야 한다. 다른 기업들도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홍빠오를 내놓았다. 기업은 홍보하고 매체는 후원을 받으며 시청자는 돈을 번다. 중국의 모바일결제시장은 다른 선진국과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 중국이 특별히 스마트폰 보급이 많다거나 모바일 기술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한국이나 미국 등과 비교하면 분명하다. 대신 중국에는 모바일결제의 경쟁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최대경쟁자인 신용카드의 사용률은 중국에서 극히 낮다. 신용카드를 발급하기 위해서는 신용조회 회사가 개인의 신용정보에 기반해 작성한 신용등급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인 중 도시 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용등급이 없는 상황이다. 10억이 넘는 인구를 신용조회·평가 하는 것이 큰 일인데 신용조회가 가능한 평가시스템이 없는데다 있어도 믿지 못한다. 알리페이를 만들면서 마윈이 가장 고민한 것이 이런 점이었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마음 놓고 물건값을 지불하고 판매상들도 받을 수 있는 지불수단 말이다. 알리페이 같은 모바일결제는 소비자가 보유한 은행 계좌에서 바로 판매상에서 계좌로 바로 이동하는 구조다. 이는 약간의 정보기술(IT)만 있으면 된다. 수수료도 크게 낮출 수 있다. 국내 금융권 관계자는 “모바일결제가 진보된 기술이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맞지 않다”며 “기술보다는 규제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모바일결제와 신용카드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모바일결제는 반드시 계좌에 잔고가 있어야 한다. ‘외상’이 허용될 수 없는 구조다. 판매자가 외상을 주려면 구매자 개인에 대한 신용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중국에서는 부족하다. 현재 중국 신용카드 보급률은 20%가 채 안된다. 반면 한국은 신용카드가 이미 일반화됐다. 신용카드 보급률은 90%가 넘는다. 외상거래인 신용카드는 기간을 정해 할부도 가능한데 대개 무이자다. 은행이나 카드사를 활용해 외상 거래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현금거래 같은 알리페이 결제가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전통적으로 현금 거래를 해온 중국인들에게 갑자기 등장한 모바일결제는 신기한 도구였다. 현금을 은행에서 찾아 지갑에 넣고 가서 가게 주인에게 건네주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전송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중국인들은 곧 터득했다. 중국인들이 모바일결제를 편하게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개인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금융구조 상의 문제다. 우선 중국에는 위조지폐가 많다. 특히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지불해 본 한국인들은 누구나 처음에 불쾌한 감정을 가진다. 돈을 받는 중국인 점원이 지폐를 이리저리 살피고, 때로는 전등에 비춰보기도 한다. 받은 돈이 위폐가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다. 이는 위폐 범죄가 종종 일어나는 중국에서 당연한 절차인데,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누굴 사기꾼으로 보나” 하는 나쁜 감정을 가지게 한다. 거래마다 위폐 여부를 감별해야 하는 중국인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즉 모바일결제 과정에서는 당연히 이런 수고가 필요 없게 된다. 이런 ‘위폐발생 가능 유통시장’이 한국 등 선진국과 다른 점이다. 더 중요하게는 여전히 개방되지 않은 금융구조다. 신용카드 시장이 성숙되기 위해서는 해외 개방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필수적이다. 중국은 여전히 문이 닫혀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1월 처음으로 미국 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푸어스(S&P)가 독자적으로 신용평가 서비스를 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내주기로 했다. 다만 이것도 최근 격화되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에 대한 회유책으로 내놓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직 글로벌 양대 신용카드사인 비자와 마스터카드의 위안화 결제 승인 신청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신용평가 및 신용카드 시장이 성장할지는 의문이다. 앞서 말한 10억 인구에 대한 신용평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고 있는 셈이다. 일부 모바일결제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바일결제가 신용카드의 필연적인 다음 단계인가는 논란이 많다. 한국에서도 인터넷쇼핑에 전자결제는 많이 이뤄진다. 하지만 대부분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결제하는 쪽을 이용한다. 선진국일 수록 현금이 아니라 신용, 즉 외상 거래를 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데 신용카드가 바로 그것이다. 모바일결제는 한국 내의 경우 ‘체크카드’와 같은 방식으로, 어떤 형식이든지 이미 보유한 자금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또 금융구조도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중국에서 모바일결제의 확산은 분명 기업들이 주도를 했다. 다만 이러한 모바일경제사들이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중국정부가 허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모바일결제는 모바일결제업체가 별도로 금융업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A씨가 위챗페이를 통해 대금을 지불할 경우 돈은 위챗페이에 맡겨진 것이거나 제휴관계의 은행 계좌에서 나간다. 보통 은행계좌와 연계돼 지불 된다. 은행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지불시스템의 주도권은 모바일결제 업체에 있다. 즉 금융과 유통에서 가장 중요한 소비자의 빅데이터가 모바일결제 업체에 집중되는 것이다. 은행들은 자금만 관리하는 수동적 입장인 셈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허용했다. 나름 신산업을 육성을 위해서라는 것이 금융전문가들의 평가다. 이와 관련, 개인정보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모바일결제로 해결되고 이런 데이터가 집적될 수록 정보보호는 더욱 중요해진다. 엄격한 보호시스템 작동하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 당국의 의도를 의심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가운데는 모바일결제 대신 일부러 현금을 사용한다는 경우도 많다.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다른 금융계 관계자도 “모바일결제가 보다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금융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며 “다만 한국적 금융상황이나 소비자들 입장에서 그렇게 필요한가는 의문”이라고 전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
포털 '다음' 차단한 만리방화벽...대체 뭘 잘못했길래
국제 경제·마켓 2019.02.16 10:06:10중국에서 한국 인터넷 포털 ‘다음’ 접속이 차단된 지 3주째를 지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지난달 27일부터 다음 사이트 접속을 완전히 막고 있다. 16일 현재 다음 사이트에 접속하면 ‘이 페이지에 연결할 수 없음’이라는 표시만 뜬다. 중국에서는 10여년 전부터 다음 내 일부 블로그 등이 막힌 상태지만 지금은 아예 사이트 접속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음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주중 한국대사관이 중국 측의 설명과 시정조치를 요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타부타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타깃이 다음만은 아니다. 네이버 카페와 블로그도 지난해 10월부터 막혔다. 네이버 뉴스 접속이라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카카오톡·라인 등 메신저 접속도 사실상 차단된 상태다. 포털없는 생활이라니. 중국 현지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의 생활불편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중국인들의 생활은 편해졌을까.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해외의 포털이나 언론매체를 거의 접속할 수 없다. 뉴욕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 등 영미권 언론, 홍콩과 대만 언론 등에 더해 구글·페이스북·유튜브·트위터·인스타그램 등 포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도 열리지 않는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다음과 네이버가 문제지만 글로벌 차원에서는 구글과 관련한 논란이 더 크다. 구글은 지난 2006년부터 중국에서 검색엔진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중국 정부의 검열정책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0년 접속이 차단됐다. 최근에 중국의 검열정책에 굴복하는 듯한 ‘드래곤플라이 프로젝트(중국의 검열·통제를 따르는 중국용 검색엔진 개발)’를 추진하다가 미국 내외의 강력한 비판을 맞고 중단한 상태다. 중국은 ‘황금방패(공식 명칭은 금순공정·金盾工程)’라는 인터넷 검열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지난 1998년부터 운용되기 시작했으며 20여년 동안 나름의 기술 발전을 이뤘다. 공식적으로는 해로운 인터넷상의 콘텐츠로부터 중국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다. 하지만 ‘유해한’이라는 꼬리표는 무한정 확대 중이다. 이유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없다. 사실상 중국 정부가 모든 내용을 자의적으로 삭제할 수 있다. 해외 사이트의 접속 자체도 마찬가지로 수시로 차단된다. 해외에서는 이런 인터넷 방화벽이 거대한 만리장성과 같다며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 of China)라고 불린다. 틀리지 않는 표현이다. 다만 과거 만리장성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막지 못한 것처럼 현재 만리방화벽의 효과도 궁극적으로 중국이나 중국민에게 득이 될지는 의문이다. 중국은 자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만리장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만리장성의 ‘가성비’는 형편없었다. 만리장성을 실제 구축한 한족 왕조는 ‘진시황’ 영정의 진(秦)과 주원장의 명(明) 정도다. 하지만 진과 명은 내부 반란으로 멸망했다. 명은 100여년의 인력과 경비를 들여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만리장성을 건설했지만 1644년 만주족이 이 벽을 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명의 멸망은 당시 지배층들의 실정 때문이었다. 특히 만리장성을 쌓고 유지하는 부담은 농민들이 격분시켰다. 다음을 포함해 구글이나 유튜브, 페이스북 등 글로벌한 온라인 채널 없이 중국인들은 어떻게 정보를 획득하고 생활할까. 중국 자체의 것이 있기는 하다. 구글 대신 바이두가 있고 유튜브 대신 유쿠, 트위터 대신 웨이보, 카카오톡 대신 위챗(웨이신) 등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바이두나 유쿠, 웨이보, 웨이신 등은 사실상 중국 국내용이다. 즉 중국인들이 정보를 올리고 중국인들이 받아보는 것이다. 반면 한국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나라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또 사업에도 이용하는 유튜브를 중국인들은 접속할 수 없다. 당연히 중국에 있는 한국인 등 외국인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는 중국인들과 타국 사람들의 정보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유튜브를 통해 세계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외국과, 그렇지 않은 ‘우물안 개구리’ 중국은 완전히 다른 출발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한국의 TV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도 대히트를 할 때 당시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인 왕치산 중앙기율위원회 서기가 “왜 중국은 이런 작품을 못 만드냐”고 질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중국인들이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리방화벽은 중국문화의 해외전파에도 장애가 된다. 한국에서 어떤 변두리 가게가 유튜브에 뜬 동영상으로 인기방문지가 됐다는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의 상품과 장소를 이용할 때도 SNS는 거의 필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그게 안된다. 웨이보나 웨이신에 올려봤자 단지 중국내 국내용일 따름이다. 중국 방송에서는 춘제 연휴 때 유명 오리 요리집인 취안쥐더(전취덕·全聚德)에 대한 특집이 나왔다. 무려 155년 된 명품 가게라는 설명을 곁들여서다. 방송은 “취안쥐더 오리가 디즈니의 오리(‘도널드 덕’을 의미)보다 더 유명하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중국 내에서만 사실이다. 웨이보나 웨이신에는 취안쥐더에 대한 소개들이 넘쳐 나지만 정보는 대개 국경선을 넘지 못한다. 중국 정부가 왜곡된 해외에 주의 주장에 대해 항상 반박을 내놓지만 이는 해외 언론이나 SNS에는 반영이 안된다. 반영이 되더라도 또 왜곡되곤 한다. 유튜브나 트위터를 직접 이용한다면 훨씬 효과가 좋을 듯한데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대만은 다르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신년인사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세계적인 반향을 받았다. 그는 “중국도 자유와 민주의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특히 상호주의가 문제다. 예를 들어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중국의 바이두, 유쿠, 웨이보, 웨이신을 아무 장애 없이 보고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구글이나 유튜브, 트위터, 카카오톡이 안된다. 베이징 소식통은 이에 대해 “중국 당국은 자국 내 법률에 따른 것이라며 이의 제기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전했다. 이러한 불공정에 대해 미국도 발끈하고 있다. 최근 구글이 중국 검열정책에 맞춘 검색엔진을 개발한다는 보도에 대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구글의 (중국 전용) 검색엔진 개발은 중국 공산당을 돕는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미중 무역협상에서 인터넷 채널 문제는 제기되지 않고 있지만 미국의 전반적인 무역전쟁 강공에는 이런 근본적인 불만이 깔려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만리방화벽’의 타깃은 해외 사이트만이 아니다. 중국 전문가들은 원래 만리방화벽이 중국내 인터넷 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최근에는 검열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최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해 중국 웨이신에서 기사 검열로 미중 무역전쟁, 불량백신 파동, 미투 등의 기사가 무더기로 삭제됐다고 전하기도 했다. SCMP에 따르면 홍콩대 연구진이 지난해 웨이신에 보도된 104만건의 기사를 분석한 결과 1만1,000여건의 기사가 검열됐다. 웨이신이 중국인들의 필수 정보 유통 통로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역전쟁 뉴스는 이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셈이다. 만약 보통의 중국인이 미국인과 만나서 양국의 최대 이슈인 무역전쟁에 대해서는 토론을 벌인다면 전자는 결코 후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무역전쟁에 미래 중국의 사활이 걸려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굳세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중국 국가사이버정보판공실(CAC)은 지난달 3일부터 21일까지 733개 웹사이트와 9,382개 스마트폰 앱을 삭제했다. 또 같은 기간 709만여건의 인터넷 게시물과 SNS 등 온라인 계정 30만여개를 내렸다. 모두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유해한’ ‘불법의’ 등의 의견만 붙어있다. 특히 중국 내에서도 대기업인 텐센트의 뉴스 추천 앱 ‘텐텐 콰이바오’를 꼭 집어 “인터넷 생태계를 저해하는 저속하고 부정적이며 해로운 정보를 유포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중국의 인터넷 정책이 규제 위주인 것은 아니다. 어르는 것이 있다면 달래기도 있다. 중국 당국이 원하는 ‘긍정적인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서다. 즉 중국 공산당 중앙정법위원회가 운영하는 웨이신 계정 ‘창안젠’(長安劍), 런민일보의 소셜미디어 계정 ‘협객도’(俠客島) 등이 그것이다. 다만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이에 대해 홍콩 SCMP는 “중국 정부가 인터넷 단속과 함께 육성을 위해 노력하지만 오히려 젊은 세대의 불만과 냉소주의만 확산 되고 있다”고 전했다. /베이징=최수문 특파원 chsm@@sedaily.com -
[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3> 자연의 역습?…무분별한 개발에 ‘사막화'되는 베이징
국제 정치·사회 2019.02.09 10:15:20“야! 눈이 온다.” 중국 베이징 왕징에 거주 중인 한국 주재원 A씨는 지난 6일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잠을 깼다. 중국도 연휴라서 늦잠을 자려고 했지만 ‘눈이 온다’는 소리에 저절로 눈이 뜨였다고 한다. A씨가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진짜 눈이었다. 한국에서 흔한 눈이지만 베이징에서는 이를 보기 쉽지 않다. 작년에는 3월에야 겨울 첫눈을 만났던 기억이 있다. 다만 이날 눈은 곧 그쳤고 아파트 단지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다음날 중국 언론은 전날 온 눈에 대해 중국 기상 당국이 이렇게 정리를 했다고 전했다. “베이징 관내 20개 관측지점 중 (기준선인) 10개 지점 이상에서 눈이 관측돼 올 겨울 첫눈으로 인정된다.” 얼마나 왔는지는 애써 집계하지도 않았다. 강설량이 아주 미미했다는 의미다. 어쨌든 이날 눈 때문에 베이징은 65일 만에 ‘첫 강수’를 기록했다. A씨와 가족들이 몇 년째 경험하는 것처럼 베이징의 건조함은 악명이 높다. 기본적으로는 비가 잘 오지 않고 그나마 있는 습기도 몽골 사막 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황해 쪽으로 쓸려가 버린다. 베이징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심한 감기에 걸린 기억이 있다고 한다. A씨도 “베이징에 온 첫해 아이들과 가족들이 겨울 내내 감기와 비염을 달고 살았다”고 전했다. 베이징의 건조함은 중국 기상국이 집계한 공식 통계가 말해준다. 지난 한해 베이징의 총 강수량은 575.5㎜였다. 이는 서울의 연평균 강수량(1,450㎜)의 3분의 1에 불과한 수치다. 설상가상으로 강수량은 매년 줄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강수량이 620.6㎜였다. 이것이 2017년 540.7㎜까지 떨어졌다. 통계상으로는 2018년이 다소 늘어난 것으로 해석되지만 이에는 함정이 숨어있다. 지난해 7월 16~18일 호우와 7월 24일 태풍이 각각 집중됐는데 이때 나흘 동안 200㎜ 정도가 한꺼번에 내렸다. 갑자기 쏟아진 비가 땅에 흡수되지 못하고 그냥 바다로 쓸려간 당시 경우를 빼면 오히려 작년 강수량은 전년보다 더 적었다고도 볼 수 있다. 가끔 폭우라도 오는 여름에 비하면 특히 겨울의 건조함은 충격적이다. 작년 겨울 베이징에 첫눈이 3월17일에 왔는데 당시 첫 눈이 오기 전까지 무려 145일 동안 비나 눈이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베이징 역사상 최장기간 ‘무(無)강수’ 기록이다. 즉 올해 2월6일에 내린 눈 같지 않은 ‘첫눈’은 작년에 비한다면 상당히 빠른 셈이다. 또 베이징의 겨울 강수량(또는 강설량)은 매년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베이징일보에 따르면 20세기 후반기에 들어 베이징에서 눈이 오는 날은 10년 만에 하루씩 줄어들고 있다. 즉 1960년대 16.5일이었던 겨울 강설일은 2017년 전후해서 10.1일로 줄어들었다. 50여년 만에 겨울철 강수량이 3분의2 이하로 떨어졌다는 말이다. 덧붙여 지난해인 2017~2018년 겨울 베이징의 공식 강수량은 0.2㎜다. 이는 1981년 이래 최저치였는데 올해는 이 기록도 깨질 것으로 중국 언론들은 보고 있다. 강수량의 절대 부족은 베이징의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베이징의 토양은 거의 사막 수준이다. 흙에 수분이 거의 없어 바람이라도 조금 불면 먼지가 풀풀 날린다. 그나마 도심은 아스팔트나 큰크리트에 덮여있어 속살을 인식하기 어렵지만 맨땅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교외로 갈수록 먼지는 더 심해진다. 이에 따라 차들이나 건물들이 모두 회색에 가까운 외피를 쓰고 있다. 최근 미세먼지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그냥 ‘먼지’는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 베이징을 오는 사람들은 베이징의 자연환경에서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서울이나 도쿄, 파리, 런던 등 주요 도시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큰 강인데 베이징에는 이것이 없다. 원래는 있었는 데 현재 없어졌다고 하는 편이 맞다. 지도상으로는 베이징 시의 외곽으로 2개의 주요 하천이 있다. 시가지를 기준으로 서쪽에 융딩허(永定河·영정하)와 동쪽에 차오바이허(潮白河·조백하)가 바로 그것이다. 원래 별로 크지 않은 강인데 현재는 대부분 말라 있다. 베이징의 식수원을 만든다며 두 하천의 상류에 댐을 쌓았기 때문이다. 바로 융딩허 상류의 관팅저수지와 차오바이허 상류의 미윈저수지다. 베이징 거주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생활용수 및 공업용수 사용이 증가할 수록 저수지에 물을 모아둘 필요성이 더 커지고 이에 따라 베이징을 따라 흐르는 하천 유역은 더 말라 간다. 결국 인간들의 경제생활이 더 활발해질 수록 도시는 더 건조해지는 셈이다. 베이징 서쪽 융딩허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다리’(정식명칭은 루거우차오·蘆溝橋)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그의 책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격찬한 곳이다. 다만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임이 분명한데 정작 강 바닥은 말라 있어 석조다리만 애처롭게 보인다. 기상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베이징은 거대 도시가 자리할 위치가 아니라고 말한다. 생태적으로 건조기후대에 속하는 베이징 지역은 용수나 식량 면에서 현재와 같은 2,000만 이상 인구를 부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주로 동남부에 설치됐던 경제특구가 북상해 베이징 인근으로 확대되는 것도 향후 물 부족을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앞서 후진타오 정부 때 만든 톈진의 빈하이신구에 이어 현 시진핑 정부는 베이징 서남쪽에 서울 면적(605㎦)의 3배가 넘는 최대 2,000㎦ 규모의 국가급 경제특구를 조성하는 중이다. 공업용수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특구가 자리를 잡아갈 수록 베이징 인근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베이징은 자연생태와는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에서 중국의 수도가 됐다. 처음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국가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였고 이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로 이어진다. 여진족이나 몽골족은 농경민이 아닌 유목민(혹은 반유목민)이고 또 자체 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건조한 베이징의 자연도 견딜 수 있었다. 이들은 만주와 몽골, 그리고 중국을 잇는 중심지로 베이징을 수도로 선택했다고 해석됐다. 문제는 한족의 국가인 명나라에서 시작됐다. 명나라는 원래 난징을 수도로 했지만 이후 베이징으로 옮겼다. 원나라 같은 세계제국이 목적이었을 테다. 15세기 초인 당시 수도 이전에 대해서도 한족들은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계유정난처럼 조카를 죽이고 황제가 된 명 영락제 주체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주장한 ‘새로운 정치 중심지’ 논리에 따라 결국 한족 왕조 처음으로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가 됐다. 인구와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베이징 토양이 받은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왕조가 무너진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의 수도 건설 구상도 흥미롭다. 북벌로 중국을 재통일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난징을 ‘중화민국’ 수도로 정했다. 베이징은 수도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공산당은 다시 베이징에 수도를 뒀다. 명·청을 계승한 ‘중화부흥’을 위해서는 베이징이 수도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베이징이 필요로 한 물자는 상하이 등 남쪽에서 끌어와야 됐다. 당시에도 베이징의 기후가 적합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한 중국사 전문가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1950년대 베이징으로부터의 수도 이전이 강력히 제기됐지만 마오쩌둥 등 중공 지도부의 반대에 밀려 무산됐다”고 전했다. 최근에도 간간이 수도 이전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데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베이징이 처한 수도로서의 불편함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테지만 이것을 공론화할 수 있는 여론 조성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동력을 받기는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중국 정부 관계자들이 자국의 미세먼지 발생이 줄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에 옮겨간 미세먼지에 대한 중국 책임론을 희석하는 것은 베이징과 그 주변이 가진 자연생태 조건의 열악함을 애써 무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달 중국 생태환경부 고위관계자는 “서울의 미세먼지는 주로 서울에서 배출됐다. 중국의 미세먼지 발생량은 줄어들고 있어 한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
춘제(설)마저 변질된 중국...그 속에 숨은 시진핑의 야욕
국제 정치·사회 2019.02.02 11:15:38고려시대 승려인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 김덕만이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으로 등극했다. 그러자 당시 당 태종이 즉위를 축하한다며 붉은색·자주색·흰색의 3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모란 꽃씨를 보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하들이 ‘어떻게 그림만 보고 향기가 없는지는 알 수 있나’고 물었을 테다. 여왕은 “꽃 그림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벌과 나비가 없으니 그것은 향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는 나에게 남편이 없다고 당 임금이 놀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신하들이 그림과 함께 가져온 씨앗을 왕궁 뜰에 심었는데 정말 여왕의 말대로 향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예로부터 선덕여왕의 현명함과 신라의 자주성을 일컫는 사례로 제시돼 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가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번번히 패하기만 한 당 태종 이세민이 실제 신라에 대해서 이런 고차원의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했을까. 기자가 만난 국내의 한 중국사 전공 교수는 다르게 해석했다. 그는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은 어떤 대상을 높고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강한데 특히 모란꽃은 중국인에게 ‘부귀’를 상징한다”며 “역사상 이런 모란의 이미지가 극대화한 것은 당나라 시기부터로, 지금도 중국인들은 모란을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즉 당 태종은 보통 중국인들의 느낌대로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의미에서 모란꽃 그림을 이웃 나라 군주에게 보냈는데 중국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선덕여왕이 지레짐작 확대 해석했다는 설명도 가능한 셈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명절 ‘설날’도 한국과 중국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다. 중국에서는 설을 춘제(春節·춘절)이라고 부른다. 음력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날’로서 전통시대부터 내려온 명절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변화폭이 크다. 한국에서 중국 춘제를 인식하는 것은 대개 이 기간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인 유커(游客)의 숫자 변화에서다. 중국의 일방적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이 있기 전인 2016년 춘제 연휴 일주일간 한국을 찾은 방한 관광객이 16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국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사고 관광지를 돌아봤다. 최근 사드보복이 얼마간 해소되면서 이들 유커를 다시 유치하는 것이 한국 관광·유통업계에서 최대 관심사가 됐다. 이외 중국 춘제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알려진 것은 고향을 가기 위해 기차역에 몰리는 엄청난 인파와 함께 시끄럽고 또 미세먼지를 유발하며 밤새도록 계속되는 폭죽 놀이 정도가 될 것이다. 연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중국내 관광지에서의 무지막지한 인파도 종종 한국 언론을 장식한다. 춘제를 전통적인 면에서 한번 보자. 설을 지내고 가족들이 모이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과 중국이 비슷하다. 차이점은 설날 당일에 차례 등 모든 행사가 집중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은 설 전날 저녁에 쏠린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차례를 지내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춘제 관련 행사는 춘제 전날, 즉 음력 12월30일(제석·際夕 이라고 한다) 밤에 집중된다. 중국인들은 ‘녠예판(年夜飯)’이라고 해서 설 전날 저녁을 풍성하게 차려 설이 되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먹고 마시기를 계속한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것은 이 자리에서다. 아이들에게 세뱃돈 격인 ‘홍바오(紅包)’를 주기도 한다. 광란적인 폭죽놀이가 펼쳐지는 것도 제석에서 설날로 이어지는 밤이다. 전국 각지에서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관련 기관 차원에서 다양한 전통행사가 열리는 것도 빼놓을 수는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들도 각각 지방현장 순시에 나서 민심을 듣는다. 또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명절의 기간이다. 지나치게 면적이 넓은 나라다 보니 이동시간도 오래 걸리고 이에 따라 연휴도 길다. 1주일 이상 쉬는 경우가 보통이다. 기자가 중국인 지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번 주초에 연락을 했는데 그는 “지금 고향에 와 있어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대답이 들었다. 중국 당국은 일찌감치 지난 1월 21일부터 무려 40일 동안을 춘제 특별수송기간인 ‘춘윈(春運)’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자처럼 베이징 등 대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식당 같은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고 관광서나 기업과 연락할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세계 최악의 교통체증이 사라지고 미세먼지도 약해진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만난 한국 기업가들의 전언은 더 현실적이다. 중국에서 업무 연도는 사실상 춘제 이후에 시작된다. 춘제 전후로 열흘 내외를 쉬고 직원들이 모두 돌아오는 시기에 맞춰 2019년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의미다. 1월부터 2월까지는 ‘붕’ 떠 있는 느낌인 셈이다. 춘제를 지내러 고향에 내려간 생산직 직원들이 복귀를 안 하는 경우도 많아 인사이동과 직원재배치가 이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최근 베이징현대차가 춘제를 맞아 중국내 산재한 5곳 공장을 대상으로 인력재배치를 했는데 이것이 중국 일부 언론에서 ‘소프트감원’이라고 오해받기도 했다. 베이징현대차 관계자는 “늘상 춘제 전후로 인력이동이 있다”고 전했다. 최근 춘제의 의미가 중국에서는 달라지고 있다. 춘제가 국가의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40일 간의 ‘춘윈’를 진행하고 있는 것과 함께 중국 국영 중앙방송국(CCTV)은 매일 춘제에 대한 특집 방송 중이다. 아무리 국영방송이지만 춘제 특집은 유별나다. 춘제 관련 방송을 하면서 CCTV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덩(等··기다리다)’와 ‘따오(到·이르다)’다. 합치면 ‘돌아옴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방송에서는 도시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딸들이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는 것, 부모님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대개 부모들은 자식을 기다리며 음식을 준비 중이다. 모여서 녠예판을 먹는 장면도 계속된다. 중국이 이른바 ‘사회주의화’ 되면서 많은 중국적 전통이 파괴됐다. 명절에 의미를 부여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 당국은 ‘춘제’를 대표적인 전통명절로 삼아 공산당 주도의 중화부흥 성공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쓰고 있는 셈이다. 한 베이징 소식통은 “사회주의 색채가 옅어지고 중국적 색채가 강화되면서 춘제가 다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오나 청명도 있지만 역시 동아시아 전통 명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설날(중국은 춘제)과 추석(중국은 중추제·中秋節)이다. 이 가운데 중국에서 중추제의 위치는 애매하다. 음력 8월15일인 추석은 보통 양력으로 9월에서 10월에 걸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10월1일 ‘건국절’과 겹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날이 건국절인데 보통 일주일 정도 연휴가 주어진다. 중추제 연휴를 길게 할 경우 건국절과 잇따르게 쉬게 되기 때문이 보통 중국에서 중추제는 간단히 넘어간다. 현대가 전통을 이긴 사례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나 중국인들이 하나 남은 춘제를 중요하게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적 특색의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중국에서는 매년 3월 ‘양회’라는 정치행사가 열린다. 이는 우리의 국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함께 공산당 및 기타 정당 간의 회의인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를 말함이다. 양회는 중국 정치에서 최대 행사다. 물론 전인대나 정협은 공산당이 결정한 사항을 사후 추인하는 요식행위라는 의견이 주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하기는 하다. 우리도 설날 민심이라고 해서 설 연휴에 지역에서 오가는 여론이 이후 정치논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국도 이는 마찬가지다. 춘제 기간에 어떻게 바닥 민심이 돌아가느냐에 따라 양회에서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중국 당국이 춘제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지난해 전인대에서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없앤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등 공산당의 권한이 강화될 수록 양회에 앞선 춘제 연휴의 의미를 더욱 키우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CCTV에서 올해 지겹도록 반복하는 ‘덩따오(等到)’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부모’인 공산당으로 ‘라오바이싱(老百姓·중국 인민)’이 돌아오라는 추론이다. 중국의 지상목표인 경제성장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매년 1~2월을 애매하게 보내는 것도 결국 정치가 경제를 이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
[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1> ‘14억 대국’에 어른거리는 인구감소 쇼크 그림자
국제 경제·마켓 2019.01.26 09:10:06‘14억 인구대국’ 중국이 인구 걱정을 한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미중 무역전쟁과 경기둔화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 경제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복병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 인구 문제다. 무역전쟁이나 경기둔화와는 달리 인구 문제는 장기지속성을 가지고 한번 고착되면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인구감소 우려는 아직 중진국 티를 벗지도 못한 중국에 더 치열한 고민을 안기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최근 깜짝 놀랄 만한 중국 인구통계를 발표했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 총인구가 13억9,538만명에 그쳤다는 것이다. 산술적으로는 전년 말보다 530만명이 늘어났다. 올해는 14억명을 돌파할 것이 확실시된다. ‘인구대국’의 위용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수치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 숫자가 더 이상 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선진국들을 짓누르는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중국에서도 이미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통계에 따르면 20018년 한 해동안 중국에서 태어난 출생아 수는 1,523만명이다. 대한민국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새로 태어난 셈이다. 하지만 전년도와 비교하면 이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숫자다. 전년도인 2017년에 1,723만명이 태어났던 점을 감안하면 1년 만에 출생아 수가 200만명이나 감소한 셈이다. 2016년 1,786만명에서 2년 연속 급감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엔도 중국의 인구 감소문제를 경고했다. 과거 인구과잉을 우려하던 것과 정반대다. 유엔은 중국 인구가 2027년 최고점을 찍은 후 감소세로 돌아설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 도달할 최고 인구는 14억4,000만명 내외로 추산했지만, 예상외로 빨라지는 출산율 감소에 인구 최고점은 이보다 빠른 시기에, 더 적은 수치에 그칠 수 있다. 타오타오 인민대 사회·인구학원 부교수는 CCTV에 출연해 “인구문제는 종합적인 경제·사회대책을 필요로 한다”며 “주택과 취업을 포함해 여성노동보호, 세금, 출산휴가, 영유아보육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경제를 위협하는 인구쇼크는 이미 시작됐다. 우선 노동인력의 부족이 가시화하고 있다. 수십 년 간의 지속적인 저출산에 따라 지난해 중국의 노동가능인구(15~64세)는 7억7,590만명에 그쳤다. 이는 전년보다 54만명이 감소한 것이다. 중국에서 노동가능 인구가 줄어든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다.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풍부한 노동력을 무기로 그동안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왔던 중국의 명성은 토대부터 흔들리게 된다. 경제가 아직 성숙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수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최근의 중국 경제성장률 하락이 무역전쟁이라는 ‘사건’ 때문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가의 인구감소는 경제성장에 따른 저출산과 관계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 편해지면 아이를 적게 낳는다. 이는 우리나라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다만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 일본은 4만달러 내외라는 점에서 이제 겨우 1인당 소득 1만달러 수준인 중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사실 중국의 인구문제는 국가 정책과 직결되는 문제다. 바로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1가구 1자녀’ 정책이다. 1978년 개혁개방을 선언한 덩샤오핑은 인구 증가가 경제성장의 걸림돌이라고 보고,1980년 국내외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며 이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 시행이 어떤 윤리적·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는지는 차치하고, 인구 문제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잠시 중국 인구를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아편전쟁의 충격이 닥치기 직전인 1840년 청나라 인구는 4억명 내외로 추산된다. 역사적으로 동양사회에서 인구 증감은 군주나 지역 관리의 선정 능력과 직결됐기 때문에 나라가 평안할 때는 인구가 늘고, 폭정이나 전쟁 등에 시달리면 인구가 줄었다. 중국 근대에 들어와서 전쟁과 자연재해가 잇따르면서 인구 규모는 매우 유동적으로 움직였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늘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중국에서 과학적인 인구조사가 실시된 것은 1953년에 이르러서다. 당시 인구집계는 6억194만명이었다. 110여 년 만에 인구는 50%가 늘어난 셈이다. ‘사회주의’ 중국에 들어서면서 어땠듯 참혹한 전쟁은 없어지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구는 급증했다. 이런 인구급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두고 중국 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1957년 마인추 베이징대 총장은 인민일보에 ‘신인구론’을 발표하며 “인구급증이 예상되고 이에 따라 식량부족 등 전반적인 생활수준 하락이 예상된다”며 인구의 양적 억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의 절대권력자이던 마오쩌둥이 제동을 걸었다. 그는 “지금은 인구가 많아야 좋다”고 못을 박았다. 그는 ‘인구(人口)’가 아닌 ‘인구(人手)’로 부르자고도 했다. 인구를 소비층이 아닌 노동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후 중국 인구는 급속히 늘어났다. 개혁개방 선언 후인 1982년에는 10억2,225만명에 이르렀다. 30년만에 두 배 가량으로 불어난 셈이다. 중국 정부가 ‘1가구 1자녀’라는 초유의 정책을 내놓은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다. 생산은 한정적인데 인구가 많으면 나눌 몫이 적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된 정책이다. 이를 통해 1987년 2,500만명에 달했던 한해 출생아 수는 1990년대 2,000만명 선에서 2000년대 1,500만~1,600만명 선으로 떨어졌다. 출생아 감소 문제는 1자녀 정책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이 다시 자녀를 낳게 된 시점인 2010년을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중국이 경직된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1960~1970년대 태어난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 가정에서 한 자녀만 낳도록 강제하면서 이런 인구보너스는 희석됐다. 결국 강제적 인구정책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1기 집권기인 2016년에 폐지됐다. 2자녀 이상 가질 수 있도록 정책이 바뀌면서 2015년 1,655만명이었던 출생아 수는 2016년 1,786만명으로 반짝 늘었다. 하지만 추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2017년 곧바로 꺾어지더니 2018년에는 충격적인 수치로 나타났다. 중국 국가통계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수(1,523만명)은 ‘인구재앙’이나 다름었던 지난 1960년, ‘대약진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의 1,392만명 이후 최소규모다. 사람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소득이 높아지는 한편으로 교육비는 더 빨리 상승하면서 부모들이 자녀들 양육에 부담을 갖게 되는 동시에 결혼을 아예 하지 않는 성인들이 늘어나면서다. 게다가 중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다자녀를 허용했다고 해도, 이미 1자녀 정책에 젖어버린 개인들의 심리까지 바꾸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구가 적은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총 인구가 10억명으로 줄어도 여전히 ‘인구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인구 수만 보고 낙관론을 펼 수 없는 것은 중국에서 급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의 만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11.9%였다. 고령사회(인구중 노인비율 14% 이상)가 눈앞이다. 한국은 이미 지난 2017년 말 노인비율이 14.2%를 기록하며 고령사회로 들어섰다. 이웃 일본에서 보듯 노인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은 사회에 부담을 키운다. 노동력이 줄어드는 것과 함께 노인부양이라는 짐은 오히려 커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일본보다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고령화로 치닫고 있다. 일반적으로 먹고 살만하면 출생률은 떨어진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어 온 중국에서 강제적인 산아 제한정책은 필요 없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일부 성질 급한 정부들은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리수를 뒀고, 이것이 최근 저출산 문제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강하다. 하지만 여전히 산아제한 정책의 잘못을 인정하는 국가는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닝지저 국가통계국장은 “(출생아 감소는)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라며 “(향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식의) 과도한 해석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외부의 시선은 많이 다르다. 중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6.6%에 그쳐 1990년 이후 2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수출에서 내수로 경제의 엔진을 바꾸려는 중국에서 인구 감소가 현실화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이 될 것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40년 개혁개방의 산물이기도 한 중국의 인구쇼크가 향후 중국의 정치와 경제에 큰 부담을 안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징=최수문 특파원 chsm@@sedaily.com
이시간 주요 뉴스
영상 뉴스
서경스페셜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