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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주목받는 민중미술 화가 신학철

"우리네 삶의 이야기·고향 정취, 화폭에 담았죠"

화가 신학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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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다룬 그림으로 민중미술 대표 작가로 꼽혀

'모내기' 작품으로 옥고 치르기도… 10여년 아내 간병끝 활동 재개

현실에 가까운 화풍 보여주려 대중매체에 실린 사진으로 작업

역사의 대서사시 그리다 보니 화폭에 담긴 힘찬 에너지 느껴져


"매년 5월이면 온 동네가 모심기로 바빴어요. '모내기(1987년작)'는 법 없이도 사는 세상, 신씨네와 김씨네가 반반 살던 집성촌인 경북 김천의 우리 마을 이야기에요. 봄에는 보리밭이 파랗고 집집마다 살구나무가 있어 노란 초가지붕 위로 살구가 붉게 익어가곤 했죠. 그리운 그곳을 천도복숭아가 매달린 무릉도원이라 생각하곤 했어요. 모를 심고 잘 키워 풍년 앞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통일'로 그린 건데…. 통일이라는 주제에 맞게 우리 동네 뒷산 자리에 백두산을 그렸어요. 그림 아래에 쓰레질로 밀어버리는 38선 철조망도 있고요."

화가 신학철(72·사진)이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제2회 통일미술전'에 출품했던 '모내기'를 묘사했다. 순박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농군이 되기를 꿈꿨던 화가는 이 그림 때문에 옥고를 치렀다. 전시 후 민족미술협의회가 1989년도 달력에 이 그림을 실었는데 한 재야청년단체가 이를 이용해 부채를 만들면서 느닷없이 서울시경 대공과 경찰들이 신 화백의 집에 들이닥쳐 작품을 압수해 갔다. 북한을 찬양한 것이라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고 징역 10월에 선고유예를 받아 구치소 생활 3개월 만에 보석으로 나왔다.

1990년대를 달군 화가 신학철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단색화'가 세계 미술시장의 관심을 끈 후 뒤이을 시장의 주도주로 신 화백이 속한 '민중미술'이 주목받는 까닭이다. 파킨슨병을 앓던 아내 간병으로 13년 이상 그림을 접었던 신 화백이 다시 붓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러 서울 장안동 작업실 겸 자택을 찾아갔다. "지기(地氣)보다 천기(天氣)가 가깝다"는 고층 아파트 볕이 잘 드는 거실에 천장에 닿을락 말락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거실의 벽면이었다. 빛바랜 흑백사진부터 신문 스크랩과 다양한 매체에서 눈여겨본 이미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신 화백의 작품 특징은 다양한 매체에서 수집한 사진을 오려 붙인 '콜라주'를 밑그림 삼아 이를 포토리얼리즘(사진처럼 생생한 사실주의 화풍)으로 화폭에 옮기는 기법이다. 왜, 어쩌다가 화가가 됐느냐는 물음에 신 화백은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우리 동네로 사진사가 찾아오는 바람에 태어나 처음 찍은 사진이라오. 대여섯살 쯤? 그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건지 저기(사진을 가리키며) 앞주머니에 작은 칼을 갖고 다니며 조각을 깎아댔죠. 국민학교 4학년 때 교과서를 보고 그린 '선죽교'였던가 싶은 그림이 크게 칭찬받으며 '잘 그리는 애'로 찍혔고 남의 반 환경미화에 걸 그림까지 그려주고는 했죠."

그게 밑천이 됐다. 나고 자란 동네 풍경을 그렸고 딱히 볼 만한 게 없으니 달력 그림을 따라 그렸다. "내가 '이발소그림' 형식을 택했다기보다는 그렇게 경험했던 것뿐"이라는 신 화백은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눈여겨봤다.

하지만 화가가 될 줄은 몰랐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까 하고 빈둥거리던 그를 교사이던 사촌 형이 고등학교로 끌고(?) 갔다. 독일계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던 성의상업고등학교로, 김수환 추기경이 초대 교장을 지냈고 옆 여학교에서 시낭송 잘하던 여학생이 지금의 이해인 수녀가 된 곳이다. 학교에서도 한복 입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한국식 성화(聖畵)'로 연하장 만드는 일을 그가 도맡았다. 미술대학을 가게 된 계기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갓 부임한 유희영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스승으로 만나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다.

"사랑방에 촛불 켜놓고 줄리앙(석고상)을 독학으로 그렸죠. 수양버들 가지를 깡통에 집어넣고 흙 발라 아궁이에 구워서 목탄도 직접 만들어 썼던 시절이지."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학년 때 담임이 '단색화' 거장 박서보였고 학생 시절에는 추상도 구상도 다양하게 시도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며 미국 팝아트를 접했고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 붙여 작업하는 콜라주를 처음 시도했다. 졸업 후에는 화성·안양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모내기'를 그린 것도 서울 신림동에서 교사로 있을 때였다.

"사진 콜라주를 다 만든 다음에 그것을 보고 그리는 건데 예전부터 손이 느렸던데다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학기 중에는 못 그리고 방학 때만 그리곤 했지요. 그리운 우리 옛 동네를 그린 '모내기'를 그 사람들(경찰)은 적화통일로 해석하더니 도무지 내 얘기를 듣지 않더라고요. 하기야 1980년대 그 시절은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사회적 분위기를 뒤덮던 때이기는 하지요."

'모내기' 사건은 신학철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 이때부터 긴 싸움이 시작됐다. 민변에서 도움을 줘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인권위원회에도 제소했다. 유엔 측은 무죄 취지의 회신과 함께 작품을 반환하고 작가에게 보상하라고 했지만 작품은 아직도 서울중앙지검 증거물 보관 창고에 있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은…작품을 꼬깃꼬깃 접어서 A4용지 박스에 보관하고 있는 거라오. 둘둘 말아서 두라고도 했는데. 이게 100호짜리라 길어서 뚝 꺾이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상자에 접어 넣은 건가, 에휴. 만약 돌려받는다면 이것을 (그림을 상자에 넣은 채) 그대로 '흔적'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내놓을 겁니다. 정말 '흔적'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어떤 이는 신 화백을 정치적인 화가라고 분류하지만 엄밀히 따져자면 '역사화'를 그리는 화가라는 게 더 맞을 듯하다. 그의 대표작인 '한국 근대사' 시리즈 등은 일제시대 양민 학살과 독립운동 등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작의 한 귀퉁이에는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작가의 5살 시절 흑백사진의 모습도 보인다. 뭉게구름처럼 혹은 괴기스러운 망령처럼 뒤틀리며 치솟는 이미지의 중첩은 그 자체가 파란만장한 한국의 민중사(民衆史)다. 그 안에는 한국전쟁의 참상과 4·19·민주화항쟁·노동운동·농민운동·산업현장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왜곡하지 않으려 사진 이미지를 고집한다.

"'이거 거짓말 아니다. 진짜다 사실이다'를 얘기하기 위해서 사진을 씁니다. '이것 봐라. 그때 찍은 사진이 있지 않느냐'라고 하는 셈이죠. 그리고 사진은 그것이 보여주려 하는 의도와 유혹하려는 속내를 갖고 있거든요. 이렇게 대중매체에서 얻는 이미지로 작업하니 현실 가까이에 있을 수 있어 외롭지도 않습니다."

문명 비판적이고 자본주의를 꼬집는 내용이지만 신 화백의 작품 2점이 삼성미술관 리움 등 주요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사회 비판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 공립미술관이다. 이 두 곳의 경우 뜻있는 개인 소장가들이 작품을 기증했다.

신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는 2002년 시작해 지금도 현재진행 중인 20m 대작 '한국현대사 갑순이와 갑돌이'이다. 상경한 갑순이와 갑돌이를 가운데 두고 외세와 군부독재·독점자본의 이야기가 역사와 함께 펼쳐지고 그것이 뒤엉켜 한국 역사의 대서사시를 만든다.

"올해는 이것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답던 시절인 어릴 적 우리 동네 물레방아도 덧붙일 겁니다. 일제가 들어오며 파괴된 우리 민족 정서의 실락원이죠. 만들고 보니 5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의 압축 성장과 폭발적 에너지가 느껴지더군요. 이것 자체가 한국의 현대사이고 나는 그것을 형상화시키며 따라 들어갈 뿐이에요. 우리의 에너지가 이제 어디로 갈까요?"

/조상인기자 ccsi@sed.co.kr·사진=권욱 기자

He is…


기자명




△1944년 경북 김천 △1964년 홍익대 서양화과 입학 △1970~1975년 한국 아방가르드(AG)협회 △1982년 제1회 미술기자상 △1987년 민족미술인협회 공동대표 △1990년 제1회 민족미술상 △1999년 제16회 금호미술상 △2010~2013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대중이 보는 그림 비싸면 안됩니다


포스트 단색화로 시장의 관심 높지만 민중미술의 진정한 의미 잃지 않아야

조상인 기자



"그림이 비싸면 안 됩니다. 싸게 해서 민중들이 같이 봐야 하는 거라고요."

1984년의 어느 날, 한 화상(畵商)이 신학철을 찾아와 2,500만원에 그림을 사가지고 갈 때 그가 했던 말이다. 어찌 됐건 목돈이 들어왔고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큰 잔치를 벌였다.

신 화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민중미술'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과정 등을 소재로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다. 예술이 '자본의 꽃'이라면 민중미술의 태도는 그 대척점에 있었다. 그러나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전'을 열며 야인들이 주류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미술 시장의 호황과 함께 작품값도 꽤 올랐다. 그리고 올해는 연초부터 '포스트 단색화'라며 민중미술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요란하다.

"그런 관심 앞에 씁쓸한 것은 '어떻게 싸웠느냐'의 문제가 흐릿해지는 겁니다. '민중'이라는 이름은 민중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과 따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죠. 물론 장사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일이고 화랑도 각자의 생활이 있겠지만 적어도 작가들은 거기에 매몰돼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나갈까 고민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고 그래야 '진정성 있는 작품'이 나옵니다."

"내가 아쉬운 게 있다면 지난 십몇 년간 아내 간병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이라오. 지금이나 그때나 분명 해줄 말이나 보여줄 그림이 있었을 텐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하고 살았다고 생각한 그 시간에도 뭔가가 내 안에서 자동으로 움직였던 모양이에요. 세상을 보고 만지던 것을 오로지 집사람한테로만 향했던 시기지만 안 그렸다고 해서 안 그린 것만은 아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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