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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의 영화 속 그곳]파란 바다·섬·사랑…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22)통영 당포성지-'쎄시봉'

1970년대 포크송 열풍 다룬 영화

여주인공 한효주가 출세하기 위해

지고지순한 남자친구 떠나보낸 곳

14세기 왜구 침략 막기 위해 쌓은 성

雉에 오르면 통영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섬들 사이 푸른 바다 어우러져 탄성만

성지 한복판 아담한 정자는 운치 더해

당포성지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풍경.




영화 ‘쎄시봉’ 스틸컷.


당포성지 한복판에 자리한 정자.


영화 ‘쎄시봉’ 스틸컷.


“넌 날 위해서 뭘 해줄 수 있어?”

지난 1960~1970년대 포크송 열풍을 주도한 음악 그룹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쎄시봉’에서 자영(한효주 분)은 자신을 끔찍이도 아끼는 남자친구 근태(정우 분)에게 묻는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한 구절을 멋지게 뽑아 올린 근태가 이내 답한다. “평생 너를 위해 노래할게.”

이 말을 들은 자영은 근태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는 이제 막 연예계에 데뷔한 자신을 성공의 길로 인도해줄 영화감독 명찬(김재욱 분)에게 간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선배였던 명찬은 자영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그 시절 자영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던 명찬이 뒤늦게 구애의 손길을 내민 터였다. 근태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그 손길을 붙잡은 자영은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순수한 연애놀음 따위는 이제 그만두자고,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노래’가 아닌 ‘출세’라고.

자영이 근태의 의중을 슬쩍 떠보는 저 장면은 경남 통영의 당포성지에서 촬영됐다. 산양읍 삼덕리에 있는 이곳은 고려 공민왕 때인 14세기 후반 최영 장군이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해 쌓은 성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점령당했으나 그해 6월2일 이순신 장군이 탈환했다. 이 전투를 일컫는 말이 바로 당포승첩이다.



성지에 발을 들이고 조금만 걸으면 적의 동태를 관찰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돌출시킨 시설물 ‘치(雉)’가 나온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통영 앞바다의 풍경을 한눈에 담아갈 수 있는 ‘뷰 포인트’다. 한산도·추도·하도 등 여러 섬이 간격을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옆으로는 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장군처럼 우뚝 솟은 산봉우리인 ‘장군봉’도 보인다. 성지 한복판에 자리한 아담한 정자는 호젓한 운치를 더한다.

마을에서 차를 타고 꽤 올라가야 이를 수 있는 당포성지는 접근성이 썩 좋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평일 대낮에 가면 관광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곳보다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곳을 선호하는 취향이라면 당포성지는 뜻밖의 감동을 안겨줄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연애 역시 힘의 역학이 작용하는 인간관계의 일종이므로 언제나 상처받는 쪽은 상대를 더 깊이 사랑하는 약자(弱者)다. 이쯤 되면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자영이 근태를 떠난 것은 우선 출세가 절실했기 때문이지만 달리 얘기하면 성공이고 야망이고 다 팽개치고 달려들 만큼 근태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중반 데이트를 하다 통금시간을 넘겨버린 어느 밤을 묘사한 장면에는 두 사람의 앞날을 예감하는 슬픈 전조가 담겨 있다. “나 너랑 자고 싶어. 그래서 네 마음 확인하고 싶어…”라고 쭈뼛거리는 근태를 자영은 이런 말로 무안하게 한다. “같이 잔다고 네 여자 되는 거 아니다. 이 근처 친구 집에 가서 잘래.”

길거리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슴이 터져라 달린 두 사람은 곧 자영의 친구네에 당도한다. 근태가 아쉬움 가득한 눈길로 자영을 들여보내고 발걸음을 돌리는 찰나, 자영은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갑자기 몸을 확 돌려 근태에게로 뛰어간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연인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 어느새 나타난 통금 단속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근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듯 빙글빙글 돌고 단속원은 이 로맨틱한 광경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본다.

‘연애의 희열’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어지는 이 시퀀스는 참 좋은 장면이다. 아무리 엄혹한 시대라도 어디선가 사랑은 피어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태양이 작열하듯 타오르는 사랑을 한낱 통금 따위가 꺼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더없이 낭만적인 톤으로 웅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꿈에 그리던 ‘자영의 남자’가 되지는 못했어도 우리의 착한 주인공은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책망하며 이렇게 노래할 뿐이다. 영화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이 직접 가사를 쓴 이 곡의 제목은 ‘백일몽’이다. ‘이른 봄날에 꿈처럼 다가온 그대 영원할 줄 알았네/ (중략) 떠나가도 좋소, 나를 잊어도 좋소 /내 마음 언제나 하나뿐 /더욱더, 더, 사랑 못 한 지난날들 후회하오’ /글·사진(통영)=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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