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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799년 엘리 휘트니의 소총

미국식 대량생산 시발점

1799년 1월14일 미국 정부가 발명가 엘리 휘트니와 소총 1만정 납품계약을 맺었다. 당시 34세던 휘트니는 6년 전 조면기(Cotton Jin)를 발명해 미국의 산업과 정치 지도까지 바꿨던 인물. 판자와 크랭크축, 원통형 밀대 2개, 벨트가 전부인 조면기는 40~50명이 필요하던 목화솜에서 씨를 빼는 작업을 한 사람이면 충분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구조가 너무 간단해 복제가 수월했다는 점. 농장주들이 너나없이 베껴 휘트니는 끝없는 소송전에 돈도 못 벌고 몸도 지쳤다. 대신 미국 경제는 성장 가도를 내달렸다.

엘리 휘트니의 교화 가능한 소총 개념도 일부.




조면기가 등장한 1793년 미국의 면화 생산량은 225만㎏으로 세계 시장점유율이 5% 남짓했으나 남북전쟁 직전인 1860년에는 9,000만㎏으로 불어났다. 미국은 이집트와 인도를 제치고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조면기는 정치도 바꾸었다. 흑인 노예의 노동력이 핵심 생산수단으로 부상하며 노예 가격이 급등했다. 남부 일각에서 일던 노예제 폐지론이 쏙 들어가고 북부와 남부의 대립도 점점 심해졌다. 미국 중앙정부와 주 정부들은 조면기를 개발하고도 돈을 벌지 못한 청년 휘트니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다.

로열티가 아니라 주 정부들이 제공한 보상금으로 10만달러를 모은 휘트니는 총기 회사를 차렸다. 예일대 법대 졸업생의 인맥을 활용해 그는 결국 계약을 따냈다. 총기 제조 경험이 전혀 없는 회사에 막대한 물량을 맡겼다는 비판 속에 1801년 휘트니는 정부 관계자 앞에서 시연을 펼쳤다. 전시된 소총 열 자루를 분해해 부품을 섞은 다음 아무렇게나 조립하는 시범은 정부는 물론 경쟁업체에도 충격을 안겨줬다. 장인들이 소총의 부품을 일일이 깎아서 만들던 시대에 50개 주요 부품 규격화부터 시작한 휘트니 소총은 크게 ‘북군의 승리와 아메리칸 시스템’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호환성 높은 소총을 사용한 북군은 개인화기에서 남군에 앞섰다. 반론도 있다. 경제저술가 찰스 모리스는 ‘타이쿤’에서 미국에서 소총 호환 시범의 주인공은 휘트니가 아니라 1834년 존 홀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은 ‘휘트니 소총의 호환성이 완벽하지 않았어도 미국식 대량생산의 시초였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휘트니 후손들의 공장 귀퉁이를 빌려 무기 생산에 뛰어든 새뮤얼 콜트를 거쳐 헨리 포드로 이어지며 미국식 대량생산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휘트니의 발명은 공통된 부작용이 있다. 대량생산과 무기의 그늘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얀 솜에 스민 검은 피눈물처럼.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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