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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영양 불균형 해소 수단서 '색다른 별미'로 속속 변신..1인 年73개 소비 '세계 톱'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25> 라면

1960~70년대 쌀 부족 탓 분식 장려

간편성에 맛 더해지며 삶 파고들어

경제성장 타고 라면도 고급·다양화

독특한 레시피 등장하며 인기몰이

한 고객이 서울의 대형마트에서 라면을 구매하고 있다. /서울경제DB




지난 1986년 농심 신라면이 처음 출시되고 얼마 후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항상 집에서 밥을 먹었지만 중학생이 된 후부터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친구들과 어울려 부모님이 안 계신 친구 집으로 향했다. 사람 숫자에 맞춰 봉지라면을 사고, 이어서 비디오 대여점에 들러 영화 한두 편을 빌려 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친구 집에 도착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내 집인 양 부엌을 뒤적여 가장 큰 냄비를 꺼내 라면을 끓였다.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밥솥에 담긴 밥까지 말아 먹으면서 영화를 보고 나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됐다. 이렇게 해서 나의 본격적인 라면 섭취 시대가 시작됐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무렵은 한국 라면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라면 시장의 전통적인 강자였던 삼양과 농심 이외에도 한국야쿠르트·청보식품·빙그레 등이 진출하면서 새로운 제품을 쏟아냈다. 농심이 삼양을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선 것도 이때였다. 농심은 그 여세를 몰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공식 라면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이를 기점으로 라면은 한국인들의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음식 중 하나가 됐다.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인의 라면 소비는 1인당 연간 73.7개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평균적으로 매주 1개 이상 먹고 있는 것이다.

라면의 인기는 무엇보다도 간편성과 즉시성 때문일 것이다. 끓는 물만 있으면 3분 이내에 한 끼 식사가 될 만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라면을 만드는 데는 특별한 조리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요리에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계량컵만 있다면 대부분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다. 550㎖의 물과 가스레인지(또는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된다. 여기에 계란을 깨뜨려 넣고 조리 마지막 단계에서 파를 송송 썰어 넣는다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라면을 만들 수 있다. 일반적인 라면 맛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인터넷에서 각종 기상천외한 라면 레시피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도 나왔듯이 두 개의 라면을 섞어 끓이는 방식이 유행하기도 한다. 세계 최대의 라면 소비국다운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스턴트 라면은 1950년대 후반 일본에서 시작됐다. 대만계 일본인 기업가인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1910~2007년)가 1958년에 ‘치킨라멘’을 출시하면서부터다. 안도가 일본에서는 이미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은 ‘라멘’을 공업화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열악한 식량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쌀을 주식으로 했던 일본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광대한 식민지를 잃게 되자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잉여 농산물, 특히 밀을 대량으로 제공했다. 이렇게 들여온 소맥분(小麥粉), 즉 밀가루를 소비하기 위해 빵과 같은 서양식 식단을 장려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안도는 값싼 밀가루를 이용해 ‘아시아 전통의 국수’를 대량생산해 보기로 했다.

인스턴트 라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이 많았다. 면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분 함량을 최대한 낮출 필요가 있었다. 안도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면을 뜨거운 기름에 빠르게 튀긴 후 건조시키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건면’은 먹기 직전에 뜨거운 물로 데우면 원래의 모양에 가깝게 풀어지게 된다. 이것이 인스턴트 라면의 핵심 테크놀로지였다. 라면의 스프는 사람이 잘 먹지 않는 값싼 닭 부속품을 우려낸 닭고기 육수를 분말 형태로 만들어냈다. 여기에 비타민 B1·B2와 단백질 보충제인 리신(lysine)까지 첨가해 ‘특별 건강식’이라고 홍보하기까지 했다. 안도가 세운 닛신식품(日淸食品)은 1962년 라면 제조 기술에 대한 핵심 특허를 획득한 후 경쟁사의 특허권 침해를 막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닛신은 일본 인스턴트 라면 시장에서 부동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지난 1963년 출시된 한국 최초 인스턴트 라면 ‘삼양라면’.


한국에 라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한국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인스턴트 라면 산업이 성공하기에 좋은 여건이었다. 만성적인 쌀 부족과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국의 식량 원조로 밀가루를 비교적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삼양공업의 전중윤(全仲潤·1919~2014년)은 일본에서 1958년부터 성황리에 판매되고 있던 인스턴트 라면을 국내에 도입할 수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기술이었다. 그는 1963년 일제 라면 기계 도입을 위해 상공부로부터 5만달러의 외화 사용을 할당받은 후 일본으로 향했다. 전중윤이 처음으로 찾아간 닛신식품은 삼양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행히 업계 2위인 묘조식품(明星食品)은 협조적이었다. 묘조식품의 도움을 받아 삼양공업은 그해 9월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에서도 인스턴트 라면의 시대가 열렸지만 소비자들의 식습관이 바로 바뀌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1960년대 후반 언론에서는 대대적으로 라면을 비롯한 분식(粉食)의 장점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는 거꾸로 보면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밀가루 음식이 ‘천대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분식은 원료가 저렴할 뿐만 아니라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했다. 특히 서구인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인은 단백질·지방분·무기질 섭취가 부족한 편이었는데 인스턴트 라면을 섭취함으로써 그 차이를 메꿀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듯 라면은 ‘근대 감각에 맞는 가장 효율적인’ 식품으로 당시 정부의 혼분식 장려운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그에 따라 1960년대 후반 들어서는 육군 전 장병들에게 1주일에 한 끼씩 라면을 급식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1970년대까지 인스턴트 라면은 쌀 부족과 영양 불균형이라는 실용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라면 업계가 고급화와 다양화 전략을 취하면서 색다른 별미로 자리 잡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라면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경제적 변동과 연동돼 있었다.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고 소비문화가 확산되면서 라면 역시 부족한 영양분의 공급이라는 1차적 목적을 넘어서게 됐던 것이다. 내가 라면과 본격적으로 조우하게 된 1980년대 중반은 이러한 전환점의 한가운데였다. 당시 우리는 매주 슈퍼에 들러 이번주에는 어떤 라면을 먹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 순간 우리에게는 삼양라면이냐, 신라면이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결단이었다. 이런 소소한 경험을 통해 우리 세대는 1990년대 대중 소비문화의 만개를 예비했던 것이 아닐까.

그 이후 인스턴트 라면은 또 다른 의미에서 ‘천대’를 받게 됐다. 도입 초창기에는 한국인의 영양 불균형을 해소해줄 수 있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이제는 도리어 불균형한 영양 섭취를 낳는 주범이 됐던 것이다. 라면에 대한 태도 변화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의 식습관이 빠르게 바뀐 데서 기인한다. 곡류 섭취가 감소하고 (삼겹살과 치킨으로 대표되는) 육류 섭취가 대폭 증가하면서 굳이 인스턴트 라면을 통해 단백질과 지방분을 공급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라면의 백가쟁명 시대는 라면이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소비자 입맛에 맞춰야 하는 업계의 사정을 반영한다. 어느덧 라면은 영양 공급의 수단이 아니라 맛있어서 먹는 기호품이 되었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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