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이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피치로부터의 신용등급을 자진 철회했다.
이는 피치로부터 불리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며 신용등급을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시중은행 가운데 피치의 등급을 받지 않는 경우는 하나가 처음이다. 세계적 신평사의 등급을 도중에 철회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피치의 평가를 받는 다른 은행들과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6일 기획재정부와 금융계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지난 5월24일부터 피치가 부여하는 신용등급을 받지 않고 있다. 3월 계약이 만료된 후 재계약 협상을 했지만 불발됐다.
하나은행 고위관계자는 "예전부터 피치가 평가등급을 잘 주지 않은데다 이번에 급작스럽게 평가수수료를 크게 올려달라고 해 신용등급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피치는 하나은행 측과 재계약 협상을 하면서 기본요금 15만달러에 채권발행시마다 일정 수준의 수수료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에는 11만달러만 주면 은행 기본등급 산정은 물론 채권발행 횟수와 상관없이 무비용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금융권에서는 하나은행이 수수료 문제보다 피치 측이 등급을 높게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갖고 이번에 신용등급을 철회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은행이 등급을 철회하기 전 피치에서 받은 장기 외화채권신용등급은 'A-'로 우리은행과는 동급이지만 'A'인 국민은행이나 신한은행보다는 낮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수수료 문제라면 피치도 가격을 조정하는 등 굽히고 들어올 텐데 등급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양측의 이견 조율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결국은 등급평가 문제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피치는 무디스(Moodys), 스탠더드앤푸어스(S&P)와 함께 세계 3대 신용평가사로 꼽힌다. 시장 점유율은 무디스와 S&P가 각각 40%이고 피치가 20% 남짓이다. 그러나 피치는 미국계인 무디스와 S&P와 달리 유럽과 중동ㆍ아프리카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만큼 해당 지역 투자자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뜻이다.
국내 시중은행이 피치의 등급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만큼 이례적이라는 게 금융권의 평가다. 신용평가사의 입김에 따라 해외채권 발행시 금리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이자비용이 수백억원 이상씩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은행이나 대기업 입장에서는 신평사가 절대적이다.
하지만 하나은행은 자사에 불리한 등급을 매기거나 수수료를 많이 요구할 경우에는 신용등급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3대 신평사라면 항상 끌려 다니기만 하던 우리나라 기업들도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갑을 관계'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국책은행의 한 관계자는 "하나은행이 피치 등급을 받지 않음으로써 우리들도 향후 신평사들과 협상을 할 때 등급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식으로 나설 수 있게 됐다"며 "최근 피치가 영향력이 세지면서 수수료 등을 높게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은행의 관계자도 "보통 해외에서 채권 발행시 2개사의 등급만 있으면 된다"며 "피치가 사실상 횡포를 부리는 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피치의 등급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해 해외 투자가들이 불안해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게 나온다. 피치가 메이저 신평사인데다 처음부터 피치의 등급을 받지 않았으면 몰라도 도중에 등급을 철회하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피치를 많이 이용한다.
국민ㆍ우리ㆍ신한ㆍ외환ㆍ한국씨티ㆍSC은행 등 국내 시중은행은 물론 산업은행ㆍ수출입은행ㆍ기업은행 등 국책은행들도 3개 신평사의 등급을 모두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관계자는 "처음부터 등급을 안 받았으면 모르겠지만 중간에 철회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가급적이면 등급을 받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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