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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준 벤처기업협회 회장, “글로벌화와 대기업화가 한국 벤처의 나아갈 길”

▶1995년 12월의 일이었다. 훗날 한국의 경제·산업 구조를 크게 변모시켜 나갈 한 단체가 첫 걸음을 뗐다. 벤처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기업인들이 손을 맞잡고 출범시킨 벤처기업협회가 주인공이었다. 그 벤처기업협회가 올해 12월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지난 20년간 한국 벤처산업은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어느새 튼실한 뿌리를 내렸다. 지난 2월 제11대 벤처기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해 제2의 벤처 붐을 확산시켜 나가고 있는 정준 회장(쏠리드 대표이사)을 만나봤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10개월이 지났네요. 저희 벤처기업협회 회장 임기가 2년인데,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갑니다(웃음).”

지난 10월말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역로에 위치한 쏠리드 사옥에서 만난 정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이렇게 운을 뗐다. 그는 영민하면서도 푸근한 인상의 소유자다. 안경테 너머로 눈빛은 총기가 반짝였고, 중저음의 낭랑한 목소리는 소탈하게 들렸다.

정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수년간 KT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98년 유·무선 통신 중계장비 업체인 쏠리드를 창업해 2014년 기준 매출액 2000억원대의 중견기업으로 키워낼 만큼 기업가로서 수완도 뛰어나다.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학자의 길을 꿈꿨다고 한다. 사실 그의 풍모는 대학 강단에 서 있어도 아주 제격일 것처럼 보였다. 학자가 되려고 했던 그는 어떤 계기로 기업가 인생으로 방향을 틀게 됐을까.

정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이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는 쏠리드 본사 사무실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학자를 꿈꾸다 기업가로 방향 틀어

“사실 제가 창업한 계기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도 없었죠. 단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들과 모여서 일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강했습니다. 제가 미국 실리콘밸리 근처에 있는 스탠퍼드대에서 유학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기업들을 보면서 은연중에 기업이라는 것도 대학이나 연구소 못지않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조직이구나, 기업을 하는 것도 보람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던 것 같아요. 학자의 길을 가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지만, 기업을 키우는 것 역시 굉장히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런 것들이 겹쳐 창업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웃음).”

올해는 여러모로 한국 벤처업계에 뜻 깊은 해다. 벤처기업들의 대변자이자 견인차인 벤처기업협회가 설립 20주년을 맞은 데다, 1998년 벤처확인제도가 시행된 이후 사상 처음으로 벤처인증기업 3만개 시대를 열어젖혔다.

또 지난 7월 정부가 ‘ 벤처 창업 붐 확산 방안’ 을 발표하면서 벤처 창업에서 투자 회수에 이르는 벤처 선순환 생태계 조성의 기틀도 마련됐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걸고 벤처 창업·육성을 위한 각종 지원 정책을 내놓고 있어 벤처업계 전반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황이다.

정준 회장은 말한다. “벤처기업협회의 미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나라에 경쟁력 있는 벤처 생태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물론 그 일은 하루아침에 완성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아주 좋은 벤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해도 그게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즉 환경에 맞춰 지속적으로 변해가야 하는 게 벤처 생태계입니다. 사실 우리가 항상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는 실리콘밸리만 해도 벤처 관련 시스템이 계속 변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 역시 꾸준히 노력하면서 세상의 변화에 맞춰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벤처기업협회 회장직은 여느 힘있는 자리와 달리 권세와 명예를 누리기보다는 ‘봉사’를 하는 직책이다. 한국 벤처산업 발전에 뜻을 함께하는 벤처기업인 중에서도 사명감과 책임감이 남다른 인물이 일정한 때가 되면 마치 순번이 정해진 것처럼 ‘떠맡는’ 것이 그간의 관례였다. 사실 기업인은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는 데도 분초를 아껴 써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 터에 한국 벤처 생태계 전반을 보살펴야 하는 벤처기업협회 회장직을 맡게 되면 그야말로 몸이 두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 된다.

“제가 어찌하다 보니 회장을 맡게 됐습니다(웃음). 사실 벤처기업협회 회장이라는 자리는 마치 ‘릴레이 주자’ 와 같습니다. 릴레이에서는 주자들이 서로 바통을 주고 받으며 경주를 이어가지 않습니까. 릴레이에서는 어느 주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꼭 어느 한 주자가 혼자서 무엇을 완성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여태까지 전임 회장들과 많은 벤처인들이 만들어온 것을 잘 이어가는 동시에 더 열심히 뛰어서 다음 주자에게는 정말 좋은 위치에서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릴레이 주자’로서 임무 완수할 생각

정준 회장은 자신의 임기 동안 가장 역점을 기울여나갈 과제를 두 가지로 꼽았다. 벤처기업들의 ‘ 글로벌화’ 와 ‘ 대기업화’를 촉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실 글로벌화와 대기업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한 관계다. 기업이 큰 규모로 성장하려면 비좁은 국내 시장을 넘어 드넓은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게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벤처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이 되고 더욱 크게 성장하는 기업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좀더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부의 벤처 정책과 제도를 보완할 필요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벤처기업인들 스스로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더욱 노력해나가는 겁니다.”

정준 회장은 국내 벤처기업들의 글로벌화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 우선 벤처기업협회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인케(INKE·International Network of Korean Entrepreneurs: 세계 한인 벤처 네트워크)’를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다. 인케는 지난 1999년 벤처기업협회와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재미 기업협회(KASE)가 손잡고 전 세계 한민족 기업인 사이의 협력모델 제공과 비즈니스 및 인적자원 교류 등을 위해 설립한 조직이다. 2014년 기준 47개국 77개 도시에 1,0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정 회장은 국내 벤처기업들과 인케가 더욱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벤처기업 글로벌화를 지원한다는 구상이다. 또 정부 주도로 전국 각지에 설립한 창조경제혁신센터와 협력해 스타트업( 창업 초기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2014년 기준 매출액 1,000억원이 넘는 이른바 ‘벤처천억기업’은 460개사에 달한다. 그중 매출 1조원이 넘는 ‘1조 클럽’ 멤버는 모두 6개사다. 매출액 1,000억원이면 통념적으로 중견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매출액 1조원은 어디서나 명함을 내밀 수 있는 당당한 대기업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 2014년 기준 ‘1조 클럽’ 멤버 중에는 한국 벤처의 대표적 성공신화로 꼽히는 네이버, 휴맥스가 포함돼있다. 이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도 하다.

벤처천억기업과 1조 클럽은 벤처기업인들의 도전정신과 성취욕을 고취시키는 롤모델의 역할도 한다. 스타트업이나 초보 벤처기업은 벤처천억기업을 일차 목표로 삼고, 나중에 벤처천억기업이 되면 또 다시 1조 클럽을 지향점으로 삼아 더욱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1조 클럽’ 벤처 수십 개 되는 날 와야

“현재 벤처천억기업이 460개 정도 되니까 욕심 같아서는 몇 년 안에 1조 클럽 기업이 적어도 수십 개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5~10년 뒤를 내다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1조 클럽 기업이 탄생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벤처천억기업 중에는 가능성 있는 기업들이 꽤 있습니다. 저는 그 시기가 좀더 앞당겨졌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우수한 인력도 많이 모여야 하고, 또 인수합병(M&A)을 통한 성장도 모색해봐야겠죠.”

정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인터뷰 내내 환한 미소를 디면서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 전후 한바탕 뜨거운 벤처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얼마 뒤 코스닥시장 거품붕괴와 함께 열풍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리고 기나긴 빙하기가 뒤를 이었다. 한국 벤처 생태계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모바일 혁명 덕분이었다. 아이폰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2010년 이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중심으로 한 모바일 분야의 창업 열풍이 일어났다. 모바일이 제2의 벤처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진원지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정책은 벤처 창업 붐에 기름을 부었다.

정준 회장은 벤처기업인으로서 1차 벤처 열풍과 2차 벤처 열풍을 모두 깊숙이 체험했다.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정 회장의 진단이다. “사실 열풍의 강도로 보면 2000년이 더 셌습니다. 그때는 대기업 직원, 대학 교수등 소위 인기직업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에 뛰어드는 그야말로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죠.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직업 간 인력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때가 2000년 전후 벤처 열풍 때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창업이 활성화되고는 있지만 1차 벤처 열풍 당시만큼의 인력이동이 있지는 않습니다. 이공계 졸업자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아직 높게 나타납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벤처 붐을 열풍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흡한 감도 있습니다. 좀더 인력이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지금의 창업 붐은 과거보다 조금 정제된 것 같고, 창업자들도 좀더 이성적이고 냉정한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반반씩 섞였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조금 더 열기가 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지금의 냉정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2000년 무렵 우리나라를 휘몰아친 벤처 열풍은 ‘광풍’에 가까웠다. 너도나도 벤처를 이야기했고, 창업에 뛰어들었다. 코스닥시장에서는 ‘묻지마 투자’가 만연했다. 그러다 거품 붕괴로 순식간에 모든 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때의 전철을 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게 정 회장의 생각이다.

“지금의 열기가 꾸준히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1차 벤처열풍이 꺼진 이후 벤처 창업에 대한 관심을 다시 끌어올리기까지 10년이나 걸렸습니다. 이번에는 몇 년 해보고 별것 없다는 식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벤처 생태계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열풍’보다 ‘지속적인 훈풍’이 부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

▲쏠리드의 팬택 인수는 ‘신의 한 수’가 될까

쏠리드는 유·무선 통신 중계장비 분야를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제품은 DAS(Distributed Antenna System)다. DAS는 통신 기지국 범위 내의 안테나 신호를 분산시키는 장치로, 빌딩이나 지하철 내에서 신호가 보다 넓게 도달할 수 있도록 한다. 쏠리드 DAS 제품은 미국뉴욕의 지하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공항 등 북미 지역의 주요 시설에 공급될 만큼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쏠리드는 적극적인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해나가고 있다. 주요 시장인 북미를 비롯해 중남미, 동남아, 유럽, 중동, 일본 등 전 세계로 거래처를 확대하고 있다.

최근 쏠리드는 과거 국내 휴대폰 시장 3강 업체였던 팬택을 490여억원에 인수하면서 세간의 큰 주목을 끌기도 했다. 원조 벤처 성공신화 중 하나인 팬택은 휴대폰 시장의 급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경영난에 빠져 법정관리를 받던 중이었다.

쏠리드의 팬택 인수는 사업 포트폴리오 확대와 함께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기 위한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쏠리드는 팬택의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계획이다. 우선 기존 스마트폰 사업은 시장 잠재력이 큰 개발도상국 통신사업자와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통한 현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외국 통신업체와 합작법인 등을 설립한 다음, 해당 현지 시장에 특화된 제품을 판매함으로써 사업 확장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미 쏠리드는 인도네시아 주요 통신업체와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추후에는 인도네시아를 필두로 다른 동남아시아국가, 나아가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 등으로 현지화 사업 모델을 확대해나간다는 전략이다.

또 쏠리드는 팬택을 사물인터넷(IoT) 통신모듈시장의 선도업체로 성장시킨다는 계획도수립했다. 글로벌 IoT 통신모듈 시장은 향후 5년간 연 평균 25%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될 만큼 매력적인 시장이다. 팬택은 이동통신 단말기개발 경험과 다수의 지식재산권을 보유하고 있어 IoT 통신모듈 시장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게 쏠리드의 계산이다

■정준 회장은…

1963년생.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 KT에 입사해 연구개발본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1998년 쏠리드를 설립했다. 2005년부터 벤처기업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2014년 수석부회장을 거쳐 2015년 2월 벤처기업협회회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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