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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달러자본 보호주의'가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기저를 흔들고 있다. 글로벌 금융 시장의 주요 자금공급원이던 미국 은행들은 요즘 해외대출을 극도로 기피한 채 국내 기업 대출에 치중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해외 금융 의존도가 높은 국가의 통화들이 일제히 약세를 보이는 반면 미국 경제체질과 무관하게 달러화는 치솟는 병목 현상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급기야 국제 영업망을 갖춘 미국 금융권의 국내 경제 챙기기가 노골화될 경우 동유럽과 한국 등 신흥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커지고 이는 결국 글로벌 경제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3일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을 위주로 한 글로벌 대형 은행들이 해외지점을 대거 축소하거나 철수하고 국내 영업에 주력하면서 일부 국가에 달러 부족 사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뉴욕 소재 헤지펀드인 'FX콘셉츠'의 존 테일러 대표는 "위기에 직면한 은행들은 국내 영업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며 "미국 은행들은 이번 위기를 맞아서도 여지없이 달러 회수에 나섰고 이는 달러화 급등으로 연결됐다"고 진단했다. 실제 유로ㆍ엔ㆍ파운드 등 전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화 지수는 지난 2일 88.94포인트를 기록, 2006년 4월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테일러 대표는 "환율은 보호주의에 상당히 취약하다"며 "미국이 자국시장을 먼저 챙겨 (달러자본 보호주의 경향을 노골화하면서) 자국 내 금융기반이 취약한 통화들은 고전을 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미국 금융권에서 달러화 자본 챙기기는 만연돼 있다. 최근 국유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케네스 루이스 최고경영자(CEO)는 1월 콘퍼런스콜에서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상 미국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최선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혀 자국 경제 살리기가 최고 우선 순위에 있음을 시사했다. 특히 대부분의 미국 은행들은 막대한 구제금융을 수혈받은 상황이라 '국내 경제 회복에 매진하라'는 유무형의 압력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한스 레데커 BNP파리바 수석 외환전략가는 "세금이 투입된 미국 은행들은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며 "상대적으로 금융 시스템이 부실한 동유럽ㆍ뉴질랜드ㆍ한국 등은 이런 보호주의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된다"고 지적했다. 레데커는 "달러화는 올 6월까지 유로당 1.20달러까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점쳤다. 미국의 달러 보호주의가 세계 각국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거세다. 두드러진 것은 영국 등 유럽 강대국들에 방어적인 움직임을 강요하고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은 지난달 26일 "54개 해외 지점 가운데 36개 지점을 축소하거나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내 경제도 건사하기도 힘든 때 해외에 돈을 뿌리는 '만용'은 가급적 자제하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프랑스의 경우 지난해 11월 국내 유망 기업을 보호한기 위한 국가 펀드를 조성했고, 러시아도 지난 연말 수입차에 부과하는 관세를 최고 35% 인상하는 등 보호주의가 전세계 무역과 금융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데렉 할페니 도쿄 미쓰비시UFJ은행 외환 부문 유럽 헤드도 "미국이 1995년 4월 수입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일본을 위협했을 때 달러ㆍ엔 환율은 사상 최저치인 달러당 79.75엔을 기록했다"며 "일일 거래량이 3조2,000억달러에 달하는 현재의 외환시장에서 금융 보호주의가 미칠 파장은 그 당시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 보호주의 강화가 글로벌 경제에 재앙이 될 수 있다며 어떤 식으로든 이 같은 퇴보를 막기 위한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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