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청소년 창극 등 소재·형식도 파격적 확대
판소리 5마당 세계화 나서
유실된 판소리 7마당 복원
창극으로 재창조 작업도
가족은 나의 힘 무대는 내인생
눈감는 순간까지 공연하고파
김성녀(사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사무실 한쪽 벽에는 '만원사례'라고 적힌 흰 봉투가 여럿 붙어 있다. '배비장전' '장화홍련' '서편제' 등 최근 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작품 포스터 위에는 대부분 이 봉투가 달려 있다. 작품의 객석이 공연 내내 만원(매진)을 이뤘을 때 배우와 스태프가 소액을 담은 봉투를 나눠 갖는 것은 공연계의 오래된 전통이다. 오래된 전통이지만 창극단에는 그동안 '남의 이야기'였다. "국립창극단 창단 이후 만원사례 봉투를 나눠 가진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지난 2012년 말에 취임한 뒤 무대에 올린 작품에는 거의 다 만원사례 봉투가 붙었네요. '배비장전'은 네 번이나 공연을 했는데 다 매진이었어요. 이게 다 프로듀서나 배우나 주위 사람들을 잘 만난 덕이죠." 답변이 끝난 후에도 김 감독의 시선은 한동안 벽을 향했다. 다시 입을 연 뒤에는 포스터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제작과정과 흥행성적을 읊어준다. 영락없이 '잘난 내 새끼'를 자랑하는 엄마의 모습이다. 골동품으로 여겨졌던 창극에 새 옷을 입히는 작업에 한창인 김 감독을 3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만났다.
"저부터 보고 싶은 창극을 만들고 싶었어요." 잘나가는 배우 김성녀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머리에 그린 청사진은 간단명료했다. 골동품처럼 모셔놓고 보는 사람만 보는 창극에 현대적 감각에 맞는 세련된 옷을 입히고 싶었던 것이다. "취임 후 기자간담회를 했는데 기자들이 '기사는 써도 사람들이 창극은 안 보려 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적잖이 자극을 받았어요. 사실 저부터도 창극을 잘 안 봤고요. 그래서 '나도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들자'는 큰 목표가 생긴 거죠."
◇골동품 창극의 변신 도전=한국의 오페라 '창극'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대중에게 파고들고 있다. 김 감독의 시선은 단지 국내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처럼 창극이 세계에 내놓을 한국의 대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확신이다.
김 감독은 첫 단추로 보고 싶은 작품, 세련된 창극을 만들기 위해 세 가지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첫째는 판소리 5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세계화다.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김 감독은 과감하게 외국 연출가들과의 협업을 선택했다. 외국 연출가들이 만드는 5마당 창극을 꾀한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 연출가들이 외국 명작을 창극으로 만드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쉽게 말해 주방장 바꾸기라고나 할까. 프렌치 셰프가 된장찌개를 만들고 한식 조리장이 스파게티 요리에 나선 셈이다. 김 감독은 "그리스의 비극 '메디아'는 지난해 서재형 연출이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 창극으로 재해석했고 루마니아 출신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은 올가을 춘향전을 만들러 한국에 온다"며 "이런 작업을 통해 국내는 물론 외국 관객에게도 창극이라는 장르를 친숙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두 번째는 최근 국립창극단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창극 소재·형식의 확대다. 김 감독 부임 이후 창극단의 창극은 제목 앞에 수식어가 붙는다. '장화홍련'은 '스릴러 창극', '내 이름은 오동구'는 '청소년 창극'이었고 6월 무대에 오르는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사상 첫 '18금 창극'이다.
마지막은 유실된 판소리 7마당('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전' '옹고집전' '장끼타령' '왈자타령' '숙영낭자전' 또는 '가짜신선타령')을 복원해 창극으로 재창조하는 일이다. 전통 판소리는 총 12마당인데 현재 5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이달 무대에 오르는 '변강쇠 점 찍고 옹녀'도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되다 유실된 작품을 창극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파격적 형식·소재 논란? 그것도 관심=김 감독이 주도한 '창극의 변신'은 관객들의 큰 관심을 받았지만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과연 이게 창극이냐'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던 것. "논란 자체가 창극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라 즐기고 있다"는 김 감독은 "'창극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 '이것도 창극이 될 수 있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고 말했다.
"예전부터 고전을 가지고 하는 작품만 창극이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판소리는 전통을 지켜야겠지만 판소리에서 파생된 창극은 시대와 맞는 모습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게 제 입장이죠. 문화라는 것은 마치 패션과 같아서 돌고 돌잖아요. 지금은 제 방식대로인 창극의 현대화가 관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전통 방식을 강조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죠." 오히려 이런 순환이 있어야 문화가 발전한다는 게 김 감독의 생각이다.
◇무대 위 천상배우=창극단에서 예술감독으로 창극의 세계화를 지휘하는 그지만 무대에서는 영락없는 천상배우다. 배우 김성녀가 2시간10분간 5세 아이부터 노인, 남자와 여자 등 1인 32역을 오가는 연극 '벽 속의 요정'은 올해로 공연 10주년을 맞았다. 김 감독의 남편인 손진책 극단미추 대표이자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2005년 결혼 30주년 선물로 안긴 작품이라 더 의미가 크다.
"극단(미추) 대표이자 연출가의 부인으로 살면서 혹여나 오해를 살까봐 제가 중심에 서는 작품을 할 기회를 많이 놓쳤어요. 그러던 중 기획자 송승환씨가 여배우 시리즈로 연극을 올리고 싶다며 제의를 해왔는데 '옳다구나' 했죠. 미추의 작품이 아니라 부담도 없고. 남편이 연출을 맡게 됐는데 '30년간 미안한 게 많았다'며 '김성녀가 돋보이는 작품을 만들어주겠다'고 건넨 게 '벽 속의 요정'이었어요."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배경으로 만든 일본 원작의 모노드라마로 배삼식 작가가 일제강점기, 6·25전쟁이라는 한국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빨갱이로 몰려 벽 속에 40년간 갇혀 지내온 아버지와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벽 속의 아버지를 요정으로 알고 자란 딸의 삶을 그렸다.
배우 김성녀의 진가가 그대로 드러난 이 연극은 2005년 초연 당시 그해의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다. 관객들의 기립박수에 "10년간 공연하겠다"는 말을 내뱉은 게 10주년 공연의 단초가 됐다. "배우로서 약속을 지킨 것이 행복했어요. 10년간 의상 사이즈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긴 하죠(웃음)."
김 감독은 10년 공약을 지킨 뒤 또 다른 공약을 내세웠다. 연수에 연연하지 않고 1인 32역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때까지 공연을 이어가겠다고. 그는 "예전에 연극 '3월의 눈'을 보는데 백성희·장민호 두 선생님이 잊을 수 없는 연기를 펼치시더라"며 "선생님들에 비하면 내 나이는 청춘인데 한계를 두고 마감하는 것은 건방지다는 생각에 '갈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가족은 나의 힘=예술인으로서 배우와 예술감독·교수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면서 정작 가정에서의 역할에는 소홀했다. 스스로도 '과락'이라고 평가할 정도. 그는 "남편은 돈을 모르는 순수한 예술가예요. 전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편이 순수하게 연극만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했어요. 3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연극배우들이 굶지 않고 사는 거'라던 시절인데 부부가 연극을 했으니…저는 연극·드라마·영화를 가리지 않고 또순이처럼 지냈죠." 손 대표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아내'라고 닭살 멘트를 한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김 감독은 "남편은 살림에 대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게 없어요. 8남매의 맏며느린데도 제사에서 제외해줬고 오히려 '김성녀가 집에서 살림만 하면 국가적 손실'이라고 하죠. 대신 제가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게 채찍질을 해주는 편이에요. 나를 키운 팔할도 남편인 거죠." 아들과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엄마가 한창 필요한 시기에도 집보다는 무대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제가 밖에서 제 이름 석자를 빛낸 만큼 아이들이 티 안 내면서 받은 스트레스도 많았더라고요. 30대 중반이 넘은 아이들에게 요즘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미안함이 커서 더 그러는 것 같아요."
◇무대는 내 인생=김 감독은 연출가이자 연극배우인 아버지와 국극배우 엄마 덕에 어릴 때부터 무대가 익숙하고 편했다. 김 감독 스스로도 "내 감성의 지느러미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전자와 태교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이라고 말할 정도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무대를 밟았고 어린 시절 무대와 배우들의 의상 바구니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성인이 돼서는 무대에서 남편을 만났고 그와 함께 무대를 만들었다.
김 감독의 마침표도 '무대'가 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억지일까. 때마침 김 감독이 명쾌한 답변을 던져줬다. "얼마 전 연극 '유리동물원' 첫 리딩날이었어요. 피곤한데다 열도 나고 밥도 못 먹어 몸이 많이 아팠는데 대사를 읽는 내내 에너지가 막 끓어오르는 거 있죠. 전 역시 건강하게 무대에서 공연하다가 눈감아야 하는 천상배우인가 봐요."
She is... 1990년 단국대 국악학사 1995년 중앙대 대학원 음악학석사 2006년 동아연극상, 올해의 예술상·비평가상 2007년 한국연극협회 자랑스러운 연극인상 2007~2010년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대학원장 2010년 제20회 이해랑연극상 2012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2013년 화관문화훈장 ◇주요 작품 연극:'한네의 승천' '욕탕의여인들' '맥베드'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벽 속의 요정' 등 마당놀이:'허생전' '춘향전' '심청전' '별주부전' '삼국지' '애랑전' '흥부전' '홍길동전' 등 뮤지컬:'포기와 베스' '7인의 신부' '돈키호테' '영웅만들기' '에비타' '댄싱섀도우' '엄마를 부탁해' 등 영화:'눈꽃' '춘향뎐'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등 |
'변강쇠 점찍고 옹녀' 18금 창극 도전… "격조있는 色 표현하고 싶어요" 장승과의 전쟁 불사하는 적극적 여성 옹녀에 초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