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8ㆍ15 광복절,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중산층 육성과 서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인간개발 중심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적극 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복지라는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의미를 띠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순간부터라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 뒤를 이어 참여정부도 '참여복지'를 내세우며 우리 사회에 다양한 복지혜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고 실효성에 대한 논란도 계속됐지만 두 정권을 거치며 우리가 이른바 '복지국가'로 진일보한 것은 분명하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사회는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다.
무역 1조달러를 돌파했다는 화려한 경제 외형에도 불구하고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며 국민들의 삶은 피폐됐고 중산층이 무너졌으며 계층 간 빈부격차가 심화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고통을 겪은 후 '생산적 복지'가 돌파구로 나왔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위기를 돌파할 복지의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
◇복지 패러다임을 바꾼 DJ의 생산적 복지=일반적으로 복지라 하면 사회보장과 복지서비스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생산적 복지는 고용, 노동 등 경제활동 및 삶의 질과 밀접히 연관된 부분을 모두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개념이었다.
현재 한국 복지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전 국민 단일 건강보험 등이 김 전 대통령 취임 당시에 설계돼 시행됐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복지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기본권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겠다는 생산적 복지의 이념과 사회 각계의 합의를 바탕으로 1999년 9월 관련 법이 제정됐으며 1년 후인 2000년 9월 전면 시행됐다. 이에 따라 1999년 1조원도 안 됐던 저소득층 생계비ㆍ의료비 지원은 이듬해인 2000년에 4조원으로 급증했다. 이와 함께 2000년께부터 고용보험과 산재보험ㆍ국민연금이 1인 사업장까지 확대돼 전면 시행됐다.
현재의 건강보험체계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1998년 전국민 단일의료보험을 만드는 법안이 통과돼 현재의 건강보험 체계가 형성됐다.
이 같은 복지정책은 외형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지만 실효성 측면에서는 논란도 많았다.
특히 생산적 복지의 핵심 정책인 자활인턴사업이나 자활직업훈련은 수백억원의 예산이 배정됐지만 효과는 미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 보장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일하는 복지' 달성에는 미흡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상 시리즈 포퓰리즘만 난무=실효성 논란은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의 생산적 복지는 정책적으로 볼 때 분명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평가다.
당시 생산적 복지가 중점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개발독재의 폐해 시정 ▦외환위기 이후 사회통합이었다. 과거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미래로 가야 한다는 시대적인 숙제를 정책으로 적절하게 녹여냈다는 것이다. 또 미흡하기는 했지만 복지와 고용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했다는 점도 높게 평가된다.
하지만 2012년 현재로 돌아와 정치권에서 뜨거워지는 복지 논쟁을 보고 있자면 그 같은 시대상황에 대한 고민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나라당에서는 그래도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생산적 복지라는 말을 자주 썼지만 지금 '생산'이라는 말이 모두 사라졌다. 생산활동과의 연계고리를 잃어버리고 무상급식ㆍ무상보육 같은 포퓰리즘적 복지 경쟁에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민주통합당이 '무상급식'을 통해 복지 이슈를 선점했다면 올해 한나라당은 '무상보육'을 통해 점수를 따려 하고 있다. 만 5세만 무상보육을 실시하기로 한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0~5세로 전면 확대됐다.
민주통합당은 지난해부터 '3+1 정책(무상급식ㆍ무상보육ㆍ무상의료+반값등록금)'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정책을 집행하려면 오는 2013~2017년 무려 84조3,000억원의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자 선거를 앞두고'복지 폭탄세일'이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문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쏟아내는 복지정책에서 일자리와 복지의 연계고리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일하는 복지가 가장 인간적인 복지=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복지 논쟁이 가장 놓치고 있는 부분이 '일하는 복지' 라고 입을 모은다. 고용안정, 직업훈련, 재취업, 구인ㆍ구직 미스매칭 해결 등이 일하는 복지의 핵심 과제다.
자본주의의 꽃은 일자리이며 인간적인 자본주의란 곧 일자리 보장을 의미한다. 더구나 우리의 잠재성장률은 2030년이면 2%대 수준으로 추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복지와 생산의 연계고리를 찾지 않으면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점점 낮아지고 고령화가 본격화되는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일하는 복지는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이른 나이에 퇴직하고 빚을 내 자영업에 손을 댔다가 자산을 탕진하고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도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정책연구실장은 "재취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고용의 안전망을 촘촘하게 구축해 실업자가 고용현장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게 하는 등 적극적 노동시장과 관련된 복지정책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복지제도 자체가 일하는 복지를 훼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빈곤층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고용유인이 없는 무차별적인 최저생계비 지급이 이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최저생계비 수급자의 소득이 차상위계층보다 많아지는 소득역전 현상이다. 안종범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재 최저생계비 관련 급여가 32개 정도 있는데 이를 특정 기준에 따라 모두 주거나 모두 안 주는 방식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기준을 만들어 지급하고 고용유인을 할 수 있도록 복지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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