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유망한 디자이너
벤처 연구소 부사장 등 핵심기술 인력 빠져나가
매출 급감 사례 잇달아
대기업 46% 불과한 급여
자기개발 기회부족 이유로 연구인력 "때되면 이직의향"
정부 제도적 지원 강화해야
#1. 프리미엄 유아동복 업체인 A사는 패션 업계에서 인정받는 강소기업이다. 중국 현지에도 일찌감치 진출해 경쟁력 있는 회사로 평가 받는다. 해외 연수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지원으로 인재 양성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A사 대표는 요즘 부쩍 회의감이 든다. 연구개발(R&D), 디자인 분야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키운 젊은 인재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중견·대기업으로 스카우트돼 떠나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패션 업계에서는 A사를 '인재사관학교'라고 부르는 지경이다. 문제는 단순히 인재 유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A사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이 다른 업체로 가면서 A사 제품과 유사한 신제품이 속속 출시됐고 이에 가격 덤핑 경쟁에 휘말리는 사태가 일어난 것. A사 대표는 "인재를 빼간 대기업이 30~40%씩 세일을 하는 바람에 지난 수년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며 "인재 양성이 중소기업의 살길이라 믿었는데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같아 후회가 크다"고 하소연했다.
#2. 벤처기업 B사는 자사의 지리정보시스템 엔진을 한 시스템통합(SI) 대기업에 공급했다. 그런데 이 대기업이 다른 사업군에서도 허락 없이 시스템 엔진을 무단 사용해 B사는 소송을 진행했고 승소 판결을 받았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대기업이 회사의 핵심기술 대부분을 알고 있는 연구소 부사장을 데려간 것이다. 부사장이 떠나자 핵심인재 100여명도 동시에 퇴사했다.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인력과 기술 유출 직격탄을 맞은 B사는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국내 중소기업들이 핵심인력 확보에 애를 먹으면서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늘고 있다. 중소기업이 성장을 도모하려면 직무 기여도가 높은 인력을 장기간 고용해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핵심인력 붙잡기에 실패하면서 경영 피해를 입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중소기업연구원이 중소기업 200곳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설문에 참여한 중소기업의 34.5%가 '최근 3년간 핵심인력이 경쟁 업체 등으로 이직해 경영상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다. 피해 중소기업은 최근 3년간 평균 1.9건의 핵심인력 이직을 경험했고 해당 중소기업은 1개사당 평균 5억2,000만원의 매출 감소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중소기업 핵심인력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9.5%가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회사를 옮길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중소기업연구원은 중기 핵심인력의 장기 근속이 드문 이유에 대해 열악한 보상 체계와 자기개발 기회 부족 등을 꼽았다. 실제로 중소기업 R&D 인력의 평균 급여 수준은 대기업의 46%에 불과한 실정이다. 또 설문조사 결과 핵심인력의 이직 사유 중 '자기 개발 기획 부족'이 가장 높게 나타나 국내 중기의 인력 역량 개발 수준이나 프로그램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중소기업 핵심인력의 장기 근속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지원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들이 핵심인력에 대한 보상 체계를 강화하고 제대로 된 직원 역량 개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 차원에서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내일채움공제다. 내일채움공제란 중소기업청과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운영하는 공제 사업으로 기업주와 핵심인력 근로자가 매월 일정 금액을 공동으로 적립하고 핵심인력 근로자가 만기 5년까지 재직할 경우 공동적립금을 핵심인력에 인센티브로 지급하는 제도다. 김정열 중진공 성과보상처장은 "내일채움공제는 핵심인력 육성과 장기 재직 유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중소기업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며 "실제로 내일채움공제 가입이 직원 장기 재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 만큼 중소기업들이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내일채움공제에 가입한 기업을 대상으로 정부가 핵심인력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핵심인력을 대상으로 성장 주기별 맞춤형 교육과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중소기업이 핵심인력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다.
현재 시행되는 중소기업 병영대체복무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중소기업 병영대체복무제도 중 전문연구요원제도는 석·박사급 우수 인재가 병무청장이 지정한 기업에서 3년간 연구 인력으로 복무하면 병역의무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다. 전문가들은 전문연구요원제도 학위 기준을 지방 소재 중소기업에 한해 석사 이상에서 학사 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신 군 복무를 마치더라도 대학원에 진학해 기업에서 최소 몇 년간 일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야 한다. 백칠규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소 몇 년간 일을 더하는 조건으로 정부와 중기가 협력해 군 복무를 마친 전문연구요원의 석·박사 과정을 지원하면 중기의 경우 상당 기간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있어 인재 유출 걱정 없이 안정적인 성장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도 지원 못지않게 중기 최고경영자(CEO)들도 인력 투자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원장은 "중기 CEO들이 인력에 대한 투자를 비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로열티가 있는 핵심인력들을 많이 확보해야 기업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며 "직원들에 대한 투자를 미래를 위한 투자로 여기고 핵심인력 양성에 기업 스스로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동훈·박진용기자 hoon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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