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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양함 벨그라노의 최후





1982년 5월 2일 오후 3시 57분(한국시각 3일 새벽 4시), 남대서양 포클랜드 인근 해역. 24시간 동안 목표를 추적해온 영국의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 콩커러호가 어뢰를 쏘았다. 목표는 콩커러호를 기준으로 90도 각도로 항해 중인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 콩커러호가 목표와 어뢰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계산해 벨그라노호의 예상 침로에 발사한 어뢰는 모두 3발. 7초씩 간격을 뒀다.

첫 어뢰는 발사 55초 뒤 벨그라노호의 함수부를 찢었다. 결정타는 두 번째 어뢰. 후반부에 명중해 기관실을 파괴하고 탄약고 유폭까지 일으켰다. 콩커러호가 발사한 세 번째 어뢰도 벨그라노호와 함께 항진하던 아르헨티나 해군의 구축함을 맞췄으나 불발됐다. 장거리를 항진해온 어뢰의 동력이 다 떨어져 뇌관에 충격을 줘서 폭약이 터질 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순양함이던 벨그라노는 원래 미 해군 소속의 피닉스함. 1935년 건조돼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하다 예비함대에 돌려진 뒤 아르헨티나가 1951년 사들였다. 당시만 해도 세계 5대 부국으로 손꼽히던 아르헨티나는 780만 달러를 들여 벨그라노와 동급 자매함 보이세를 구입했다. 보이세호가 1978년 고철로 팔려 해체됐듯이 벨그라노는 노후화가 심각한 함정이었다.

영국은 벨그라노호를 낡았어도 위험 요인으로 파악했던 것 같다. 만재 배수량 1만 2,242톤급짜리 순양함이 보유한 타격력이 막 시작한 포클랜드 전쟁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클랜드 주변 200해리를 완전봉쇄구역(TEZ:Total Exclusion Zone)으로 설정했던 영국은 벨그라노호가 TEZ 바깥에 있는데도 선제공격을 가해 침몰시켰다. 아르헨티나 해군으로서는 TEZ 바깥이라고 방심하다 변을 자초한 셈이다.

순양함 벨그라노호를 뒤따르며 호위하던 아르헨티나의 구축함들은 수중음파탐지기(소나)조차 켜지 않았다. 미국 해군이 2차 대전 당시에 사용하던 섬너급 구축함을 물려받았던 아르헨티나 해군이 구축함의 소나를 부정기적으로 운영만 했더라고 기습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주 경계에서부터 실패했던 아르헨티나는 벨그라노호 피폭과 침몰로 승무원 1,138명 가운데 321명을 잃었다.

아르헨티나 해군은 이 사건 이후 바다로 나서지 못하고 항구 언저리에서 뱅뱅 돌았다. 포클랜드 전쟁은 사실상 이날로 끝났다. 사흘 뒤 아르헨티나는 프랑스제 엑소세 미사일로 영국의 최신 구축함을 격침시켰어도 전세를 돌리지는 못했다. 만일 콩커러호가 실패했다면 어찌 됐을까.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거나 전쟁이 더 오래 갈 수도 있었다. 벨그라노호의 침몰은 아르헨티나에게 그만큼 상처가 컸다.

주목할 부분은 세계의 언론이 하나같이 오보를 냈다는 점. 모두 최신 어뢰인 ‘타이거 피시’의 위력을 대서특필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콩커러호가 발사한 어뢰는 최신형은커녕 1927년부터 생산했던 Mk 8 어뢰였다. 영국은 왜 중요한 전투에서 신형을 놔두고 구닥다리를 사용했을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Mk 8의 탄두 위력이 컸다. 두 번째, 콩커러호의 함장은 구형이 성능은 떨어져도 신뢰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군대 뿐 아니라 기업들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뢰성 때문이다. 아무리 개량을 거듭했다지만 선보인지 55년 묵은 장비를 보수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전장의 승패를 가른 것이다. 또 있다. 사람의 판단력. 숨막히는 전투 상황에서 침착하게 구형 탄종을 고른 콩커러호 함장의 판단력과 자질은 저절로 배양되는 게 아니다.

역으로 아르헨티나해군은 우수한 성능의 독일제 디젤 잠수함에서 어뢰를 발사했으나 불발되는 통에 전과를 올리지 못했었다. 전장에서의 판단 능력, 장비의 보수 ·유지와 평시 가동률과 이에 따른 종합적인 신뢰도에서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는 원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됐다. 콩커러호를 비롯한 4척의 영국 원자력 추진 공격용 잠수함이 바다 밑에 숨어 활동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는 제해권을 잃었다. 원자력 잠수함들은 영국 함대가 포클랜드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정찰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잠항할 수 있는 원자력 잠수함의 존재가 영국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만 34년, 영국 해군에는 더 이상 콩커러급 잠수함도 MK 8 어뢰도 없다. 심지어 타이어피시 어뢰도 2004년에 모두 일선에서 물러났다. 영국해군은 스피어피시 어뢰를 성능 개량을 통해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 어떠할까. 압도적 전력우위를 가진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 승리의 원동력은 원잠이었건만 국내에서 원잠 보유론을 꺼내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분위기다. 다른 무기체계도 마찬가지다. 한번 연구하고 구매하면 끝이다. 실험에서 실패하고 해군의 전량 반품 요구까지 받았던 국산 어뢰가 국가홍보물에서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국산무기’로 소개되는 마당이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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