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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흑백TV로는 세상을 바로 못본다

송영규 논설위원

자본·노동 경계 사라지고

'투자=일자리' 공식 무너져

숨겨진 다양성 찾아내려면

흑백논리 틀부터 깨뜨려야





어릴 적 컬러TV 방송이 시작되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흰색과 검은색뿐이던 TV 속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바뀐다는 소식이 한창 호기심이 넘쳤던 중학생에게는 무척 신기했던 모양이다. 컬러 방송이 시작되던 날 화려한 색상이 춤추는 화면을 꿈꾸며 TV를 켰다. 그런데 웬걸. 화면은 여전히 흑백이었다. 그랬다. 그때 우리 집에는 컬러TV가 없었다.

이제는 TV도 그냥 컬러TV가 아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화질(HD) 시대가 왔다고 떠들썩하더니 이제는 자연색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초고화질(UHD)까지 등장했다. 변한 것이 어디 TV뿐이랴. 바리스타 대신 로봇이 내리는 커피를 마시고 가만히 있어도 스마트폰이 저절로 좋아하는 상품을 소개해준다.

세상 사는 법은 더 복잡해졌다. 모든 영역의 경계가 희미하다. 전에는 식당이나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자본을 투자해 자기 사업을 하는 여유로움에 대한 부러움 섞인 표현이었을 터. 지금은 보는 시선이 다르다. 오히려 노동시장에서 퇴출되거나 진입을 거부당한 이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노동자보다 못한 삶을 사는 존재 정도로 취급된다. 이름은 사장인데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벌이를 하고 있으니 사회적으로는 취약계층이요, 자본가이되 사장님이 아니고 노동자이되 고용은 되지 못했으니 ‘프티부르주아(petit bourgeois)’와도 다르다. 낮에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이지만 밤이나 휴일에는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투잡족이나 먹방 같은 1인 인터넷방송은 아예 자본과 노동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경제에서 금과옥조처럼 거론되는 것이 투자다.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하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논리는 하지만 현실에서 깨진 지 오래다. 지난해 제조업 설비투자액이 3년 전보다 4.9%나 늘었지만 취업자 수는 10분의1에 불과한 2.2%밖에 늘지 않았다. ‘참’인 줄 알았던 ‘투자=일자리’라는 등식은 거짓이 됐다.



세상만 바뀐 것이 아니다. 생각도 바뀌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은 더는 통용되지 않는 듯하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달 새 10% 이상 떨어졌다. 예전 같으면 야당이 반사이익을 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국 정치의 고질병으로 지적돼온 지역주의도 지난 지방선거에서 위세가 크게 꺾였음을 눈으로 확인한 우리다. 다양한 관점, 폭넓은 사고가 받아들여지는 사회다.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정치와 정책이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란이 다시 등장했다. 14년 전과 다를 바 없다. 정부는 삶이 윤택해지고 불평등이 해소되려면 임금이 올라야 한다며 칼을 빼 들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식당과 편의점에서 쫓겨나고 노동자면서 노동자가 아닌 600만명은 거리로 나섰다. 이도 저도 아닌,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삶은 정책 고려 대상이 아니다. 힘겨운 삶을 짊어진 이들이 최저임금 논란에 대해 ‘너무 야박하다’고 평가한 높은 분들의 말씀을 어찌 생각할까.

야당은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외친다. 이 역시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구호다. 투자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지금도 이것이 통할지 의문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 기간 일자리를 약속했던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공장은 이후 700만달러의 감세 혜택을 받고 1,600만달러를 투자했지만 직원 수는 되레 절반이나 줄었다. “회사는 번창하는데 노동자들은 아니다.” 뉴욕타임스(NYT)가 이 회사를 보며 내린 결론이다.

전에 통했다고 현재도 해법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과거가 양분법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다양성의 시대다. 참과 거짓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진실이 숨어 있다. 감춰진 다양성을 찾아내려면 보는 눈을 바꿔야 한다. 진영논리나 흑백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다. 흑백 TV로 보면 사물은 온통 흰색과 검은색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려면 UHD는 아니더라도 컬러 TV 정도는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컬러 TV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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