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재개발이 남긴 寒地, 따뜻한 韓紙에 품다 …박기호 '그 이후…' 사진전

금간 집…깨진 벽…담장의 낙서 등

철거 현장이 남긴 차가운 흔적들

작가 경험에 비춰 카메라에 담아

한지에 출력 은은한 색으로 표현

그시절 그리움을 온기더해 연출





박기호 사진전 ‘그 이후...’ 전시 전경. 재개발 지역을 찍어 한지에 출력한 후 철거 현장에서 가져온 철근에 매달아 전시했다.


박기호 ‘북아현동’ /사진제공=한미사진미술관


집 근처 산책길,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철거가 막 시작되는 찰나였다. 사진가는 버릇처럼 가까이 다가섰고 그 후로도 매일 찾아가 사진을 찍었다. 2013년, 서울 종로구 돈의문의 재개발 지역이었다. 이후 마포구 아현동으로, 성북구 길음동으로 우연인 듯 운명처럼 사진가가 머무는 곳 근처에는 재개발과 철거 현장이 있었다. 금 간 집, 깨진 벽, 텅 빈 공간에 스민 빛 등 재개발이 남긴 흔적들에 시선을 붙들려 찍기 시작한 게 꼬박 4년. 송파구 한미사진미술관에서 한창인 사진작가 박기호(58)의 개인전 ‘그 이후…’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40여 점의 사진과 벽면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철거 현장을 찍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진이 따뜻하고 곱다. 뜯긴 벽에서 알록달록 정겨운 벽지 문양을 보고, 어린아이의 낙서를 찾아내고, 촌스러운 커튼 옆에 여전히 꽂혀있는 가짜 꽃의 정겨움을 찾아냈다. 이는 작가의 경험과 추억 덕분이다. 그는 ‘산’으로 유명한 근대화가 박고석의 막내아들로, 서울 성북구 정릉에 아버지가 손수 지은 두 칸 짜리 판잣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정릉에 살았던 느낌이 새록새록 생각나 매일 찍었어요. 억지스럽지 않게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냈어요. 아무도 없는 빈 공터로 쏟아지는 그 빛이 참 예뻤는데 잠시 미국 다녀온 새에 건물이 아예 사라졌더라고요.”

사진이 꼭 그림처럼 보인다. ‘빛’을 교묘하게 포착한 까닭도 있겠으나, 보통의 인화지가 아닌 ‘한지’에 출력한 다음 ‘철근’에 걸어 설치한 효과다. “선명하면서도 아련한 기억을 새기기에 얇은 한지가 적합하다 싶었어요. 곧 찢어질지도 모르는, 이내 부서질 그 연약함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한지에 출력한 사진은 액자 없이 종이 그대로 철근에 걸었습니다. 재개발 현장에서 제일 마지막에 남는 게 바로 철근이에요. 섬세하고 약한 그 모습들이 막판까지 버틴 철근에 의지하고 있어요.”

한지 자체가 갖는 은은한 색에 작품이 더 고와 보인다. 철근에 매달린 사진은 앞뿐 아니라 뒤에서도 볼 수 있다. 사진 속 장면에 한지와 철근까지 어우러지니 그 안에 그리움과 정겨움, 추억과 기억이 차곡차곡 쌓인다.



박기호 ‘통일로’ /사진제공=한미사진미술관


박기호 ‘성대로’ /사진제공=한미사진미술관


박기호 ‘길음동’


작가는 열세 살에 미국으로 떠나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사진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20년간 외신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노무현 대통령,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의 안정환 등을 그가 촬영했다. 이영애·박진영 등의 전성기 광고사진은 물론 포브스, 비즈니스 윅, 포춘 등의 저널 사진을 맡아왔다. 소위 ‘상업사진’ 영역에서 두각을 보인 그가 순수예술로 사진 작업을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미국 전역의 비어있는 점포를 촬영한 작품을 미국에서 발표했다.

“어릴 적 아버지 따라 산에 올라가면 잠시 앉아 ‘감상하라’고 하시곤 했어요. 그게 산과 대화하는 시간이었고 그러면서 아버지는 주저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셨죠. 그때 배웠나 봐요, 사람인 내가 아니라 사물이 구도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어떤 때에는 철거 현장의 사물들이 내게 찍으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박기호 사진전 ‘그 이후...’에 선보인 벽면 설치작업.


사진가의 작업실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듯한 벽면 설치작업은 사진작가이기도 한 송영숙 한미사진미술관 관장의 제안 덕에 탄생했다. 작가는 “바닥에 뒹구는 철근과 테이프, 생각나는 대로 붙인 메모지까지도 작품인데 설치과정에서 청소하는 분이 두어 번 갖다 버리기도 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14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