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과 가을에는 울창한 나무숲이 흐르는 물길과 어우러진 멋진 쉼터가 되는 곳. 한가로이 음악을 듣거나 운동하는 주민들로 북적이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서울 강남 1번지의 산책길. 양재천 주변은 낮에는 멋진 옷을 입은 주민들로, 밤에는 초고층 고급 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한 불빛으로 항상 넘실댄다. 건너편 저쪽 한구석에 어둡고 침침한 모습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한 곳만 빼고.
과거 ‘포이동 266번지’로 불렸던 ‘개포동 재건마을’은 강남의 이단아다. 대한민국 부자의 상징, 최고 집값을 자랑하는 도곡동 맞은편에 판자촌이라니 그럴 수밖에. ‘길 없음’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시작되는 마을 입구를 지나면 드러나는 암흑과 침묵의 세상. 불 꺼진 어두컴컴한 판잣집 사이 샛길을 무표정하게 지나는 할머니, 곳곳에 버려진 빈집 앞에 걸려 있는 ‘무허가건축물 폐쇄’ 경고문, 신발과 함께 나란히 위태롭게 놓여 있는 프로판가스통…. 그 흔한 인터넷 선조차 이 마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에 판잣집들이 들어선 것은 지난 1980년대 초. 주변에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서기 훨씬 전이다. 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소외됐다. 단순한 외면이 아니다. 재건마을 주민들은 20년 동안 무허가라는 딱지를 붙인 채 주민등록 없이 살아야만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행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 2012년 우여곡절 끝에 주민등록을 받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주변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반대로 아이들이 가까운 학교를 놓아두고 먼 곳으로 통학을 다니는 시련을 겪었다. 강남 주민이면서 강남 주민이 될 수 없는 이들의 운명이다.
이곳 판자촌 주민들은 요즘 말을 잃었다. 말을 걸어도 고개만 힐끗 돌릴 뿐 아무 대꾸가 없다. 정부가 서울 집값 안정책의 하나로 재건마을에 340가구 규모의 신혼희망타운을 짓겠다는 발표가 나오면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계획대로라면 판잣집들은 헐리고 신혼부부의 보금자리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금싸라기 땅에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좀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 터다. 번듯한 아파트가 들어서면 주변 집값도 덩달아 뛸 것이라는 지역 주민의 기대감도 있다. 언론도 온통 분양가와 시세차익·입주시기 같은 내용뿐이다. 수십년 삶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도시 빈민들의 불안은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살고 있던 도시 빈민들은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질문하는 곳도 없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원해서 들어온 곳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이들을 원래 생활터전에서 낯선 곳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명목은 거리 정화, 죄명은 넝마주이이고 부랑자였다.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수난을 겪는 것도 억울한데 토지를 무단 점령했다며 구청에서는 변상금까지 물어내라고 한다. 한두 푼이 아니라 가구마다 수천만원씩이다. 그래도 못 나갔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갈 곳이 없어서다. 7년 전 큰불이 나 마을이 잿더미가 됐어도 철거될까 두려워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군 터전이었지만 아파트가 지어지면 이제 아무 연고 없는 곳으로 짐을 싸야 한다. 어쩌면 공공임대주택 입주권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벅찬 이들에게 그것을 지킬 만한 능력이 있을까. 과거 임대주택 입주권을 얻은 철거민 중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돌아보면 알 일이다.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황금의 요지를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맞다. 목 좋은 곳에 택지를 공급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집값을 잡겠다는 절박함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현재의 경제논리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애초 이들을 판자촌으로 내몬 것은 국가폭력이었다. 이제 그 원죄에 책임을 질 때가 됐다. 그 첫걸음은 재개발 이전에 재건마을 사람들을 위한 건설적이고 실질적인 이주대책이 돼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판자촌 주민들도 이 땅의 국민이다. 그 얼굴에 햇살이 비추기를 기대해본다./skong@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