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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차라리 엽관제를 하든가

권구찬 논설위원

신재민파문 촉발한 낙하산인사

정권교체 후 반복되는 악순환

그가 고발하자고 한 부조리는

직업관료제 모순과 '어공'의 한계





현 정부의 전신인 참여정부 때 일이다. 2005년 6월에 김완기 청와대 인사수석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1년 전 총선에 출마했다 부산에서 떨어진 정치인들을 공기업 사장에 기용한 것을 두고 ‘낙하산 ·보은 인사’라는 비판이 일자 반박하러 춘추관을 찾아온 것이었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요지는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정치인 기용이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었다. 오히려 ‘책임정치 실현’이라며 여당의 열세 지역에서 떨어졌다면 정치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백악관 인사제도를 사례로 들었다. “엽관제가 정착된 미국은 대통령이 바뀌면 3,500개 자리가 하루아침에 바뀐다. 우리는 그렇게 물갈이를 못한다 해도 정치권에서 잘 훈련된 사람을 재배치해 활용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엽관제까지 염두에 뒀음을 은연중에 시사한 발언이었다.

10년도 더 된 일을 꺼낸 것은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파문 때문이다. 사단은 신 전 사무관이 우연히 알게 된 KT&G 낙하산 인사 문제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업무는 아니었다지만 문건을 본 순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을 지켜본 젊은 사무관으로서는 ‘이게 정상인가’라고 느낄 법도 하다. KT&G 사장이 교체되지 않았다 해서 의도와 과정의 부적절함이 다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설픈 관치를 휘두르려다 주총에서 무위에 그친 것일 뿐이다.

기재부의 구태의연함은 실망감을 더 키운다. 의연하게 대처했더라면 해프닝으로 끝날 사안인데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신 전 사무관을 검찰에 고발한 형편없는 정무감각이 안타깝다기만 하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차관보씩이나 돼서 없어서 어떻게 하느냐”며 다그쳤던 바로 그 정무적 감각 말이다. 고위 관료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정무감각이 도대체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신씨가 제기한 국가부채 마사지 의혹은 실체적 진실 여부를 떠나 정책 결정 과정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파장이 컸던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세수가 남아도는데도 이자 부담을 떠안으면서 왜 적자 국채를 발행하려 했느냐에 있다. 누구도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미수에 그쳤다고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관료집단만 탓할 일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권력이 5년마다 바뀌면서 관료사회의 영혼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만든 정책이 적폐로 몰린 것을 여러 차례 목도해왔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그렇게 됐고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 성과연봉제가 그 짝이었다. 그들은 전 정부에서 잘 나가던 선배 공직자들이 왜 곧바로 짐을 쌌는지 이유를 잘 안다. 물갈이 대상은 비단 장·차관만이 아니다. 공공기관장은 물론 중앙부처 1급까지 직접적인 영향권이다. 청와대 인사 검증의 촉수는 국장급까지 뻗친다. 이쯤 되면 고위공직자 인사 시스템은 사실상 엽관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씨의 글은 이런 부조리를 간파하고 있다. “정권 유지에 기여하는 게 고위공무원이 지녀야 하는 정무적 판단 능력인가. 공무원은 정권 재창출을 사명으로 일해야 하나. 열심히 일해도 달 수 있을지 모르는 1급 공무원이 되면 해야 하는 정무적 판단이 이런 것인가.”

이 글에 공감하는 젊은 공무원들이 많다고 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직업관료제가 껍데기뿐인 것을 새삼 확인해서다. 전도유망한 젊은 공무원이 관복을 벗으면서 진정하고 싶었던 말은 ‘어공’의 위세에 눌려 눈치를 봐야 하는 ‘늘공’의 숙명적 한계와 직업관료제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아닐까. 고위층 늘공은 그 뛰어난 정무감각 탓에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라면 신재민의 문제의식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취임 초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주문한 문재인 대통령 아닌가. 정녕 공무원의 영혼을 바라기는 하나. 차라리 당당하게 엽관제를 하든가. /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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