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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장벽의 시대

신경립 국제부장

美 멕시코 장벽·中 만리방화벽

韓은 극심한 이념·세대 갈등벽

위기의식 조장위한 정치도구화

이제 벽 사이 문 뚫는일 나설때





“어떤 성공한 체제도 사람들을 가두고 자유를 몰아내는 장벽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미국 워싱턴DC의 국회의사당에 박수소리가 울려 퍼진다. 1963년 1월14일, 35대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는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국정연설에서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치욕의 벽(wall of shame)”이 곧 “공산주의 실패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동독 정부가 ‘반(反)파시스트 보호벽’이라는 이름 아래 쌓아 올린 베를린 장벽 얘기다.

이후 수십 년이 걸리기는 했지만 역사는 케네디 전 대통령이 결국 옳았음을 극적인 방법으로 보여줬다. 영원할 것 같던 콘크리트 장벽은 1989년 11월9일 서방 세계를 차단하려던 동독 정부의 30여년 노력이 무색하게 맥없이 무너졌고 공산주의는 역사의 패자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30년 후.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는 또 다른 ‘장벽’을 화두로 하는 대통령 국정연설이 진행됐다.

“과거 이 방에 있던 대부분 사람들이 장벽에 찬성했지만 제대로 된 벽은 결코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세울 것입니다.”



지난 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시간 20여분에 걸친 국정연설의 상당 비중을 멕시코 국경장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할애했다. 그에 따르면 국경장벽은 마약 밀매와 인신매매·성범죄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고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는 안보의 벽이다. 하지만 이 장벽이 순수한 안보를 목적으로 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미국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 장벽은 위기의식을 조장해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고 현 정부의 약점에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도구이자 인도주의에 거스르는 21세기판 ‘치욕의 벽’으로 받아들여진다. 케네디 전 대통령에 따르자면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가 직면한 위기를 스스로 드러내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배척과 단절의 장벽이 들어서는 것은 미국뿐이 아니다. 극우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유럽에서 지난 2015년 이후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쌓은 장벽은 총 1,000㎞가량에 달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절대권력 체제를 구축하려는 중국은 만리장성을 연상시키는 인터넷상의 검열·통제 시스템 ‘만리방화벽(The Great Firewall)’으로 정보를 차단한다. 국가 시스템이랄 것이 남아 있기는 할지 의문시되는 베네수엘라에서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해외 원조물자를 차단하는 독재의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들은 장벽 밖의 ‘그들’이 ‘우리’의 안정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을 부추기며 벽을 합리화한다. 하지만 베를린의 콘크리트 장벽이 그랬듯이 벽은 취약한 시스템과 그에 대한 권력자들의 조바심을 드러낼 뿐이다. 외부와의 영원한 단절과 끝없는 권력을 보장해주는 벽은 없다.

우리 역시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 이념과 계층·성별·나이에 따라 ‘나’와 ‘너’를 가르는 갈등의 벽이 한국 사회에 빼곡하게 들어서고 있다. 60여년 전 설치된 철조망이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허술해지는 것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벽은 갈수록 촘촘하고 견고하게 우리를 에워싼다. 진보·보수의 이념 대립은 물론이고 파편화한 진보와 보수진영이 어제의 동지와 단절과 대립을 일삼는다. 소득과 자산에 따라 층층이 쪼개진 계층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청년과 부모 세대 간, 남성과 여성 간 대립은 몰이해를 넘어서 혐오와 폭력의 단계로 치닫고 있다. 전 세계 어느 사회도 갈등과 반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오늘날 한국의 분열상은 도를 넘어섰다.

그런데 나라를 이끌어야 할 정치인들은 은연중에 대립구도를 조장하는 발언과 특정 집단의 코드에 맞춘 정책으로 오히려 벽을 더 높이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 같다. 함께 공격할 대상이 있으면 당장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무형의 장벽을 쌓는 행위는 결국 불완전한 신념으로 취약한 지지기반을 움켜쥐려는 파괴적인 몸짓일 뿐이다. 지금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더 높은 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벽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문을 뚫는 일이다.
/kls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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