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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2-下> 백남준과 나의 이야기(정준모·박영덕)
- 정준모 前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백남준 1984년 6월 고국땅 밟을때 첫 인연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조성 등 곁에서 보좌
"이직의 갈림길 땐 미술관 잘키워보라 조언
병세 깊어진 백선생과 韓선 유일하게 연락"
- 박영덕 '박영덕갤러리' 대표
갤러리현대서 백남준 전담 갤러리스트 맡아
위성 3부작 등 제작비서 인적자원까지 조달
"육의전 장사꾼 아들 답게 만원까지 계산 정확
주고받은 서신·작품 거래 내역 등 모두 보관"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백남준은 약간의 폐소공포증이 있었다. 병원 진단을 받은 질환의 수준의 중증은 아니었으나 꽉 막힌 공간을 상당히 싫어했다. 그래서 1984년 이후 한국에 오기 시작해 호텔에 머무르게 될 때면 숙소의 첫 조건으로 “창문이 열리는지”를 확인하곤 했다.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 내 펄 빌라 아니면 종로구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이 주로 낙점됐다. 둘 다 창문이 활짝 열린다는 게 선택의 이유였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백남준은 자신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한국을 찾은 프랑스 방송사 카날플러스 취재진을 위해 한복차림에 지구본 담은 지게를 짊어진 퍼포먼스를 1990년 7월 종로구 제일은행 앞 대로변에서 펼쳐보였다. /사진제공=박영덕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말년의 백남준과 통화한 유일한 한국 미술계 인사로 ‘백남준의 전령사’였던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성형주기자

정준모(62)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백남준과 맺은 인연의 고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그 호텔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에서도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이다. 정 전 학예실장은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서양화과 대학원에 다니던 1985년부터 토탈미술관 학예실에 근무했고 기획위원을 거쳐 학예실장까지 지냈다. 우리나라 제1호 사립미술관인 토탈미술관은 원래 동숭동에서 시작해 평창동으로 옮겨갔고 미술관 언덕길에서 내려와 큰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올림피아 호텔이 있었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하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밖으로만 돌았다. 전위적인 예술가그룹인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파격 행보를 이어온 그가 일약 세계적 유명인이 된 것은 1984년 1월 1일의 새벽방송이 결정적 계기였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제목의 모티브를 얻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뉴욕·파리·베를린·LA와 서울을 위성방송으로 연결해 동시중계한 ‘한 판 굿’같은 위성쇼였다. 1984년이 되었지만 세계는 ‘빅브라더’의 감시로 괴로운 게 아니라 전(全)지구적 소통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갖게 됐음을 보여줬다.

그런 백남준이 1984년 6월 22일,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밤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백남준을 만나기 위해 수십 명의 취재진이 게이트를 에워쌌다. 오늘날의 방탄소년단(BTS)이나 손흥민급의 관심집중이었다. 공항에서 기자회견이 열렸고 다음 날 신문들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 백남준의 금의환향을 일제히 보도했다. 기자들은 그를 취재하기 위해 불쑥 호텔로 찾아가거나 전화로 질문공세를 폈다.

당시만 해도 호텔 투숙객과 직접 통화하려면 까다로운 보안 절차가 필요했다. 호텔 리셉션으로 전화를 해서 객실마다 지정된 비밀번호를 말해야 했다. 언론의 관심을 피하기에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평창동 호텔이 아늑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고향의 바람도 신선했다. 정준모 전 학예실장은 “백 선생님의 호텔 방 전화연결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몇 안 되니 신문사 기자들이 미술관으로 전화해서 나더러 그 번호를 알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면서 “그런 이유와 핑계로 인사드리고 말씀 여쭙고 하던 게 인연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민첩하고 꼼꼼한 ‘미스터 정’(정준모)을 백남준은 신뢰했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1990년 7월에 동료인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굿 퍼포먼스를 준비하며 한복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은 백남준. /사진제공=박영덕

그 후 백남준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참가해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고 그 기세를 한국 현대미술로 이어 ‘한국관’을 만들고자 했다. 그 작업을 위해 1994년에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수차례 오갔고, 백남준과 정준모는 단둘이 기차로 이동하며 길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조성됐다. 백남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해 첫 회의 막을 올린 광주비엔날레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의 전시기획실장이 ‘백남준 연구자’로도 유명한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다. 백남준이 참여작가 겸 디렉터였던 비엔날레 특별전 ‘인포아트(Info Art)’의 큐레이터가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이다. 이들 두 사람은 올 초 진행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공모에서 최종 3인에 들 정도로 ‘미술계 거물’이 됐으니 백남준과 한국 미술계는 따로 떼서 생각하기 어렵다. 정준모는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전시부장을 맡았다.

직함은 전시부장이건만 백남준은 정준모를 전령사 혹은 심부름꾼처럼 불러대곤 했다. 비엔날레를 치른 이듬해 그는 이직의 갈림길에 섰다.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이었던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부터 미술관 근무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 전 학예실장은 생각을 정리할 겸 뉴욕으로 떠났고 백남준을 찾아갔다.

“백 선생님이 대뜸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서 임영방 관장을 도와라’ 하시더군요. 그러고는 작업실을 뒤져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의 첫 개인전을 기념하며 제작한 판화 두 세트를 쥐어 주시며 ‘내가 한국에서 일 해보니 ‘빠다칠’(빠다는 버터의 일본말로 뇌물을 뜻하는 기름칠의 속어)이 필요하더라고. 그러니 이걸 갖고 가서 미술관을 잘 키워보라’고 하셨어요. 이제 옛날 일이 됐으니 하는 말인데, 실제로 미술관에 재직하면서 예산과 인력 확보하고 소장품 모으고 할 때 요긴하게 썼고 수십 장이던 판화는 6~7년 만에 바닥났어요.”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은 병세가 깊어지면서 한국과의 교류도 멀어졌다. 백남준의 아내 구보다 시게코가 한국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을 마뜩잖아 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백남준과 통화할 수 있었던 이가 정준모였다. 작가였던 구보다 여사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출품했기에 신뢰하는 관계였다. 말년에는 백남준의 생사 여부조차도 한국에서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기에 정 전 학예실장이 한두 달에 한 번씩 전화로 안부를 확인했다. 이따금 백남준은 전화를 붙들고 “저년(구보다)이 때린다”고 한국말로 엄살을 피우거나 “한국 전화는 안 바꿔주는데 미스터 정은 바꿔줘서 다행이야”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타계 소식이 외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을 때도 뉴욕의 추운 겨울을 피해 마이애미의 별장에 가 있는 백남준 부부의 근황을 알고 현지로 전화해 부고를 확인한 이도 정준모였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요셉 보이스를 위한 퍼포먼스와 프랑스 취재진을 위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백남준이 1990년 7월 종로구 창신동 옛 집을 둘러보고 있다. 백남준의 왼쪽에 전담 갤러리스트 박영덕이 서 있다. /사진제공=박영덕

백남준 작고 10주기이던 지난 2016년 1월 28일.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원로화가 김창열(90) 화백이 차가운 날씨에 노구를 이끌고 종로구 삼청로에 나왔다. 그는 흰 줄 끝에 바이올린을 매달고 돌아다니다 전시장에 도착해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쉈다. 백남준이 1962년에 벌인 퍼포먼스인 ‘바이올린 독주’를 재연하는 것으로 그는 친구를 기억했다.

김창열은 백남준과 한국 미술계를 이어준 가교였다. 백남준이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작업하던 1960년대 뉴욕에서 한국인을, 그것도 미술가를 만나기란 가뭄에 나는 콩처럼 드문 일이었다. 일찍이 뉴욕에 정착한 김 포(Po Kim) 화백을 제외하면 1963년 10월 뉴욕으로 간 김환기 화백 정도가 오래 머물렀다. 백남준은 1965년 김환기의 뉴욕 집에서 김창열 ‘형’을 처음 만나 오랜 친구로 교류했다. 김창열은 단돈 4달러만 쥐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 넥타이공장에서 일하며 작업을 이어가는 터였다. 1969년에 백남준이 주선해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김창열은 파리로 옮겨가 활동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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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화백은 지난 2016년 1월 백남준 10주기를 맞아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재연해 긴 줄에 바이올린을 매단채 종로구 삼청로를 걸었고 도착지에서는 바이올린을 부숴버렸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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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한국 미술계를 이어준 동료 김창열 화백은 지난 2016년 1월 백남준 10주기를 맞아 갤러리현대에서 ‘바이올린 독주’ 퍼포먼스를 재연했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1983년 파리 에릭파브르 갤러리에서 백남준의 개인전이 열렸다. 백남준을 오랜만에 만나게 된 김창열은 저녁을 먹자며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마침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과 정기용 원화랑 대표가 프랑스를 방문했기에 김창열은 이들 모두를 저녁 식탁에 마주앉게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백남준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악보도 없이 ‘울 밑에 선 봉선화’와 ‘가고파’를 연주하고 흥얼거렸다. 박명자 회장은 “놀라움과 감동의 순간이었고,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음률로 호소하는 모습이 가슴을 울먹이게 했다”고 추억했다. 그 계기로 갤러리현대와 원화랑은 백남준의 한국 전속화랑으로 작가의 활동을 전폭 지원했다. 이후 백남준은 1990년 갤러리현대에서 예술 동지 요셉 보이스(1921~1986)의 추모굿을 벌였고 전시도 열었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1990년 7월에 동료인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굿 퍼포먼스를 준비하며 한복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은 백남준. 그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사진제공=박영덕

박영덕(63) 박영덕화랑 대표는 박명자 회장의 동생이다.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학 전공자인데 성품이 싹싹하고 계산이 정확한 데다 눈썰미 좋고 영어도 잘하는 터라 박 회장이 1985년에 미술계로 끌어들였다. 누이는 다짜고짜 일 먼저 시킨 게 아니라 여행부터 보냈다. 미국 시카고에서 한 달을 시작으로 뉴욕, 런던, 파리 등 3개월에 걸쳐 ‘미술관 여행’을 다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오광수 미술평론가에게 가 볼 만한 전시를 추천받았고 파리에서는 한묵(1914~2016), 뉴욕에서는 천경자(1924~2015) 화백의 장녀이자 작가인 이혜선 씨의 도움을 받으며 일종의 스터디 투어를 다녔다.

뉴욕에서 찾아간 휘트니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백남준의 대형 TV 설치작품을 만났다. 전시장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모니터로 이뤄진 거대한 작품이 현란한 영상과 함께 눈앞에 펼쳐졌고 “악 소리가 나는” 그 앞에서 얼어붙은 이는 박 대표뿐만이 아니었다. 휘트니미술관의 백남준 작품 앞 엘리베이터는 시선을 빼앗겨 꼼짝 못하는 관람객 때문에 상습 정체구역이었다. 그 후로도 몇 개월간 최신의 현대미술을 섭렵하듯 봤지만 박 대표의 뇌리에 가장 강렬한 각인은 오로지 백남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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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전담 갤러리스트로 ‘백남준의 가계부’를 도맡았던 박영덕 박영덕화랑 대표. /성형주기자

한국을 다시 찾기 시작한 백남준은 갤러리현대와 협업했고 자연스럽게 박영덕 대표가 그의 곁을 지켰다. 어쩌면 근대미술을 중심으로 회화를 주로 다뤄온 박명자 회장이 자신보다 동생 박영덕 대표가 백남준과 더 잘 맞을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마침 그때부터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다다익선’을 비롯해 대형 작품 제작이 줄을 이었고 박영덕 대표도 덩달아 바빠졌다. 위성 방송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이른바 백남준의 ‘위성 3부작’이 1988년 ‘손에 손잡고(Wrap aroun the World)’로 이어지던 때라 제작비를 조달하고 인적자원을 연결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백 선생님이 입국하시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뒷자리에 앉아 그간의 진행상황을 보고했죠. 세세하게 적은 비용 출납 내용을 말씀드리는데. 어눌하게 보이셔도 백 선생의 계산이 아주 정확했습니다. 누가 육의전 장사꾼 집안 아들 아니랄까 봐 만원 단위까지 딱 떨어지게 기억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박영덕은 갤러리현대의 백남준 전담 갤러리스트가 됐다. 백남준이 1987년 카셀도쿠멘타(독일이 전후 각성을 계기로 시작한 세계적 권위의 5년제 국제 미술제)와 뮌스터프로젝트(10년에 한 번씩 열리는 조각 전문 국제미술제)에 출품하는 것을 도왔고 1988년에 한국인 최초로 런던 헤이워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고 이듬해 파리시립근대미술관에서 전시한 작가를 보필했다.

“팩스로 보내신 작품계획을 보면 큼직하게 글씨를 시작했지만 갈수록 종이 여백이 없어 점점 작아지다 이리저리 빙빙 돌곤 해요. 글도 우리말과 영어, 독일어, 한자가 마구 뒤섞혀요. 그런데도 내용은 정확하고 판화를 찍으면 이건 누구, 이건 누구에게 전하라는 것을 정확히 구분해 주셨어요. 그런 철저함이 있었건만 백 선생님은 늘 돈 걱정이 많았어요.”

부인 시게코에게 작품값을 송금하면 다음 작업을 위한 제작비로 내주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 선생은 차기작을 위해 한국의 누이나 지인에게 ‘돈 좀 보내라’고 한 다음 작품으로 되갚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이후 1993년에 강남구 청담동에 박영덕화랑을 개관해 독립했지만 백남준에 대한 애정의 끈을 이어갔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전령사 그리고 가계부로...비엔날레·작품 활동 손발이 됐죠'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를 위해 모여앉은 정준모(왼쪽부터)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 박영덕 박영덕화랑 대표가 백남준의 도록을 되짚으며 작가를 회고하고 있다./성형주기자

연재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를 위해 박영덕 대표는 수십 년 묵은 문서목록들을 끄집어냈다. 백남준과 주고받은 팩스와 서신, 거래 내역과 작품계획안, 심지어 백남준 부부의 여권사본까지 수백 장 이상이 담긴 작품비 장부의 내용을 토대로 시기별 작품 제작과 전시를 따라 작가를 정확히 회고하기 위해서다. 박 대표는 “백 선생님을 도와 함께한 시간들에 대한 이 기록도 나중에 백남준 연구에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면서 “지금까지의 백남준을 기록한 책들은 그분을 신격화해 떠받들지만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 백남준이고, 그 자잘한 에피소드가 작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의미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준모 전 학예실장도 “말년에는 유일하게 저만 백 선생과 통화했으니 본의 아니게 연락책이 된 셈”이라며 “백남준 선생과의 인연이 나 뿐만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인연을 이제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가 숙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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