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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행장 연임이 '죄'가 되는 나라

김홍길 금융부장
은행장 임기, 美 69개월·日 50개월
외국선 주주가 원하면 10년도 가능
韓, 취임때마다 비전 제시하다 끝나
'스타 CEO' 나올 수 없는 게 당연

[여명] 행장 연임이 '죄'가 되는 나라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임기는 해묵은 논란거리다. 딱히 해법도 없으면서 누가 연임을 ‘시도’한다 하면 안에서부터 시끄러워지고 밖에서도 북치고 장구를 쳐 댄다. 최근 자료를 봤더니 주요국 시중은행장 재임 기간은 우리나라가 31개월인데 반해 이웃 일본은 50개월, 미국은 69개월이다. 2배 차이다. 수명으로 따지면 다른 나라에 비해 ‘단명’하는 것이다.

한 금융지주 회장은 사석에서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면 ‘아, 내 임기가 1년 정도 남았구나’하고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각종 행사에다 경영을 고민하다 보면 날짜 가는 줄 모르는데 황당한 루머가 나오기 시작하면 ‘임기가 끝나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주주들이 원하면 6년이든, 10년이든 쭉 간다. 물론 실적이 뒷받침돼야 한다. 정치권력도 아닌 민간 금융사 CEO가 ‘장기집권’한다고 문제가 됐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외국에서는 10년간 한 자리를 지킨 금융사 CEO들이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뉴스’가 된다. 선진국을 따라 배우자면서도 CEO 임기 문제에는 뒷짐이다.

차남규 한화생명 부회장과 하만덕 미래에셋생명 부회장이 9년, 이철영 현대해상 부회장과 박찬종 사장이 7년 정도로 오너 아닌 CEO로 장수한 케이스다. 그나마 은행 쪽에서는 ‘직업이 CEO’라는 별명을 얻었던 한국씨티은행의 하영구 전 행장만 유일하게 10년을 채웠다. 그나마 외국계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단명 CEO의 부작용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은행원 9,000명이 파업을 해도 대출·송금 차질이 없는 상황인데도 거대조직에 손도 대지 못하는 게 은행 CEO들의 현주소다. 모바일 등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은행업무가 전체의 90%를 넘지만 아날로그 은행 창구에 배치된 직원들은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그런데도 구조조정의 ‘구’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노조 반발로 인심이라도 잃으면 혹여 연임 가능성을 날릴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보험사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부터 치매보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보장범위나 금액을 크게 하다 보니 보험소비자는 유리하지만 보험사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실적을 갉아먹을 수 있는 악재가 될 수 있다. 5~6년 후에는 보험금을 많이 내줘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임기가 ‘2+1년’인 CEO들이 5~6년 뒤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신규 고객을 유치해 매출을 늘리는 당장의 실적이 더 급한 것이다.

남의 회사를 왜 그리 걱정하느냐고 따질 수 있지만 먼저 가입한 고객의 보험금을 뒤에 가입한 고객이 높은 보험료로 대신 내주는 꼴이 될 수 있어서다. 오너인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이 20년째 CEO를 맡고 있지만 그런 그도 ‘10년이 조금 지날 때쯤에야 겨우 보험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지인들에게 토로했다는 일화를 흘려 들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보험 CEO라는 자리를 금융지주 임원들이 말년에 거쳐 가는 자리로만 인식하고 있으니 놀랄 일이다.

금융사 CEO들은 취임할 때마다 저마다 장황한 미래비전을 얘기한다. 임기 내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런데 ‘3년짜리’ CEO가 말하는 비전이 내부 직원들에게 와 닿을지는 의문이다. 대부분 직원들은 적어도 눈앞에 있는 CEO보다는 자신의 임기가 더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CEO들이 단명하다 보니 금융권에 ‘스타 CEO’를 찾기도 어렵게 됐다. CEO 자리가 ‘똥값’이 되다 보니 행원들도 대출서류에 사인만 해 넘기는 기계적인 ‘은행(사무)원’만 남았다는 자조도 나돈다. 임기가 절반만 지나도 ‘영(令)’은 떨어지고 다음 CEO가 누군지에만 관심을 쏟으며 줄을 서려는 게 금융권의 자화상이다.

거기다 금융당국은 연임 이슈가 터질 때마다 ‘되네, 안 되네’하면서 단명 분위기를 재촉하고 있다. 대통령이 개입하지 말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주변의 정권창출 인사들은 금융 CEO 자리를 놓고 논공행상이다. CEO를 자주 돌린다고 지금보다 더 나은 금융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행장이 연임하는 게 ‘죄’가 되는 나라에서 무슨 금융혁신이 이뤄지느냐”며 항변하는 금융권 인사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다. 2연임을 하든 3연임을 하든, 이제는 그냥 놓아 둬도 되지 않을까. /wha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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