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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US]오래된 약에서 새 치료제 찾아내기

파넥스트 Pharnext의 다니엘 코엔 Daniel Cohen 같은 데이터 전문 과학자들이 AI로 기존 약을 조합해 유망한 새 치료법을 찾아내고 있다. 대형 제약사들의 신약개발 노력이 벽에 부딪힌 지금, AI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맨해튼 미드타운 Midtown에 위치한 고딕 풍의 좁은 건물이 있다. 이 스웨덴 루터교회 내부의 우아하고 조용한 카페 안에서, 코엔은 유전학 연구에서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카페 앞문 근처에 놓인 삐걱대는 피아노로 다가가더니, 의자에 앉아 ’무지개 넘어(Over the Rainbow)‘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실수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인간생물학이 음악으로 치면 복잡한 곡이라면, 코엔은 이를 거장의 솜씨로 연주한다. 그는 1993년 12월 최초의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한 프랑스 제네통 G?n?thon 연구소를 이끌던 인물이다. 그가 지휘한 연구진이 DNA 샘플의 처리 속도 향상에 초고속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음을 최초로 입증하면서, 유전체학에 빅데이터와 자동화가 도입됐다.

그의 성취는 전 세계 과학자들은 물론, 면역학 전공 의학박사인 코엔 자신의 활동에도 밑거름이 됐다. 이후 그는 연구자 겸 제약회사 경영인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현재, 혁신의 초기 주역 다수가 희망했던 것과 달리 유전체학에선 의학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돌파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파리에 본사를 둔 의약품 스타트업 파넥스트의 창업자 겸 CEO로서, 코엔은 왜 유전체학이라는 보물섬에 보물이 없는지 알아내려 노력 중이다.

연주를 마치고 기자에게 돌아온 코엔은 “몸 속의 단백질이 갖는 기능은 하나가 아니며 매우 다양하다”며 “사람이 사회에서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코엔은 이 현상을 “다면발현(pleiotropy)”이라 부른다. 단일 유전자가 서로 상관 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효과를 유발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다. 인류의 정복 시도에 가장 끈질기게 맞서는 질환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번번이 좌절을 겪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다면발현 때문이다.

코엔은 다면발현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 파넥스트 등 제약사들이 AI의 강력한 기능을 통해 이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신체의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AI를 활용해 질병이 몸을 덮칠 때 발생하는 일련의 연쇄효과를 더욱 체계적으로 분석 및 지도화한다. 이를 통해 온갖 질환에 대응할 수 있는 약품 조합을 개발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코엔과 연구진은 기존 약품 여러 종을 결합, 각각 투약할 때는 얻을 수 없는 치료효과를 내는 ‘재목적화(repurposing)’ 관련 연구에도 AI를 활용하고 있다. 머신러닝을 통해 느리기로 악명 높은 대형 제약사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신약 후보군을 구축하는 것이 연구진의 장기 목표다. 연구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면서, 코엔의 졸려 보였던 눈은 열정으로 커졌다. “아주 좋다(Tr?s bien).” 그는 잇따라 프랑스어로 말했다. “아주 경제적이다(Tr?s ?conomique).”

이 분야에서 파넥스트의 경쟁 상대는 구글·IBM 등 대기업부터 인실리코 메디신 Insilico Medicine, 리커션 제약(Recursion Pharmaceuticals), 베네볼런트AI BenevolentAI 등 벤처기업까지 다양하다. 모두 AI를 활용해 수백만 건의 의약 및 환자 데이터를 분석해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기 위해 투자하는 기업들이다. 하지만 2007년 설립된 파넥스트는 이들 경쟁사 대부분보다 수 년 정도 앞서 있다. 코엔이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한 유전체학과 다면발현 연구까지 고려하면 더욱 유리한 입장이다.

무엇보다, 파넥스트는 의료부문 AI 활용을 10년 이상 연구한 끝에 마침내 핵심적인 변곡점에 도달했다. 작년 10월, 파넥스트의 복합약물 중 하나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3단계 임상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낸 것이다. PXT3003이라 불리는 이 약물은 신경퇴행질환의 일종인 샤르코마리투스병(CMT)의 치료제다. 현재 불치병인 이 병의 1차적 원인은 특정 유전자의 중복인데, 이로부터 온갖 나쁜 문제가 유발되는 ‘내리막길’이 진행된다. 신경을 보호하는 슈반 Schwann 세포가 줄기세포로 퇴행해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세포 내 축색돌기의 괴사가 시작되고, 통제가 불가능해진 근육은 결국 위축된다.

파넥스트에 따르면, 3상 임상시험 결과(이에 대한 동료평가는 아직 진행되지 않음) PXT3003은 CMT를 안정화한 것은 물론 세포 재생을 통해 상태를 어느 정도 호전시키기까지 했다. 코언의 말에 따르면, CMT의 기존 치료제는 병의 진행을 늦출 뿐이다. 반면 PXT3003을 투여 받은 환자들은 2종의 장애 척도에서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개선을 보였다. 이 결과에 기반, 미 FDA는 PXT3003의 ’패스트 트랙‘ 적용을 허가했다. 중증질환 치료에 ’우수한 효과‘를 보였다고 판단된 약에만 적용하는 신속 심사 절차다.

PXT3003은 분명 희귀질환에 맞설 희망의 한 걸음이다. 그런데 기술이 파넥스트의 연구 기간을 단축하면서, 약품 설계에 걸리는 시간이 수 년씩 짧아지는 등 희망적인 장기효과도 발생했다. 전(前) 임상시험 및 임상시험에는 보통 8~10년이 소요되며, 무에서 완전히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경우 이에 추가로 7년 혹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PXT3003 개발진은 AI를 활용해 기존 약 3종을 재목적화했다. 근육 이완제인 바클로펜, 아편중독 치료제인 날트렉손, 진정제로 쓰이는 혈당 강하제 소르비톨이다. 모두 이미 사용되는 약인 만큼, 파넥스트는 안전성을 위해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1상 임상을 건너뛸 수 있었다. ‘무에서 출발’하지 않아도 됐다.

FDA의 패스트트랙 결정 덕분에 PXT3003은 이르면 2020년 중 출시될 가능성이 높다. 파넥스트는 이 외에도 많은 약품을 개발 중이다. 조만간 알츠하이머병 초기 증상 치료제의 2차 2상임상시험과 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 일명 루게릭병) 1차 2차임상시험도 시작할 예정이다. 두 후보신약 모두 기존 약품을 재목적화해 조합했다.

이 도전들이 성공할 경우, 자금력이 훨씬 우월한 다른 제약사들도 같은 방식을 쓸 수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오바마 행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캐슬린 시벨리어스 Kathleen Sebelius는 요즘 세를 얻고 있는 재목적화 유행의 일환이라고 해석한다. 현재 컨설턴트 겸 여러 헬스케어 업체의 이사로 활동 중인 그는 이를 통해 “투자 주기가 훨씬 짧아지고, 가격점 /*역주: 수요가 유지되는 가격/이 크게 달라지고, 그간 재정적 인센티브가 부족했던 희귀병 치료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매력이 큰 분야”라고 설명한다. 콜럼비아대학교 산하 캐블리 뇌과학연구소(Kavli Institute for Brain Science) 소속이며 파넥스트의 고문이기도 한 에릭 캔들 Eric Kandel은 회사가 재목적화 추세를 이끌고 있다고 본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그는 파넥스트의 방법론이 “독창적이며 강력하다”고 평했다. 캔들은 이 접근법이 확산될지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 유전학 연구가 막 시작될 무렵만 해도, 질병의 생물학이 이토록 복잡하리라고 예측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상당수 연구자는 게놈을 일종의 신체 사용설명서로 여겼다. 셀레라 제노믹스 Celera Genomics의 크레이그 벤터 Craig Venter와 미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프랜시스 콜린스 Francis Collins 등 선구자들은 ’유전자 사냥꾼‘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탔다. 전 세계 연구자들은 특정 질병의 원인을 설명하고, 치료제를 찾아 줄 만병통치약 유전자가 있다는 믿음 하에 성배 찾기를 시작했다.

실제로 보물을 찾은 경우도 어느 정도 있었다. 예를 들어, 유전학자 낸시 웩슬러 Nancy Wexler 는 베네수엘라에서 수 년간 희귀유전병인 헌팅턴병이 발병한 가문의 가계도를 모았다. 이는 개인의 헌팅턴병 발병 여부를 예측할 수 있는 단일 유전자 변이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파넥스트의 CEO 다니엘 코엔이 바클로펜과 날트렉손의 분자구조와 함께한 모습. 이 두 약물은 파넥스트가 개발한 새 치료제의 구성요소이다. 사진=포춘US




하지만 오래지 않아, 과학자들은 유전자 지도가 사용 설명서보다는 이케아 가구를 사면 따라오는 부품 카탈로그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이어 DNA로 부호화된 단백질인 단백체, DNA를 단백질로 전환하는 핵산인 전사체 등 다른 카탈로그들이 발견되면서 유전자-질병 간 관계에 작용하는 변수가 더욱 복잡해졌다.

꿈에서 깨자 고통스러운 실망이 찾아왔다. 연구자들은 암·알츠하이머 등 복잡한 질병은 단일 유전자에 기인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발병 유전자를 찾아낸 헌팅턴병도 아직 치료제는 없다). 현재 코엔 등 여러 연구자는 단순함에 대한 집착이 신약 발견의 감소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현실은 신약의 FDA의 인가율이 10개 중 1개 수준에 불과하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신약 개발비용은 치솟고 있으며(터프츠 Tufts 대학교의 최근 연구는 “26억 달러짜리”라고 명명했다), 1회 투여 비용이 47만 5,000달러에 달하는 노바티스의 백혈병 치료제 킴리아 Kymriah 등 출시에 성공한 약의 가격도 무섭게 오르는 추세다.

최근 의학계는 네트워크 과학의 힘으로 생물학적 복잡성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 네트워크 과학의 대표적 ‘전도사’는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노스이스턴 대학교(Northeastern University)의 얼베르트 라슬로 바라바시 Albert-L?szl? Barab?si다. 그의 2014년 저서 ‘링크트 Linked’는 네트워크 이론이 패션 트렌드·성(性)적 관계·질병 등 수많은 분야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대중화했다. 바라바시 등 연구자들은 질병이 유전자·단백질·세포·조직 등으로 이뤄진 연결 네트워크를 따라 흐르는 부정적 신호라고 파악했다. 이로 인한 ‘작은 변화’들이 모이면서, 결국에는 우리가 아는 질병 증상이 된다.



합병증은 수많은 결과를 동시에 낳는다. 다면발현의 특성상 한 단백질이 신체의 서로 다른 여러 지점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넥스트 류의 벤처 기업들은 약도 다면발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 이상의 단백질에 영향을 끼치고, 하나 이상의 체내 상호작용에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성에 맞설 수 있는 약 조합을 찾아내려면, 병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머신러닝의 엄청난 처리능력 및 데이터 패턴 포착 능력과 결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컴퓨터과학과 생물학의 관계가 진화해야 한다. 최근 머신러닝은 훨씬 많은 데이터를 흡수하고, 정보 간 상하관계를 조합해 상관관계 이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그래도 ‘딥러닝’ 신경망을 예측능력을 갖춘 구조로 활용하려면 숙련된 알고리즘을 구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알고리즘을 구축하는 인물이 GNS 헬스케어의 CEO 겸 창립자 콜린 힐 Colin Hill이다. 미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Cambridge에 본사를 둔 GNS는 ‘엔지니어링의 역전, 시뮬레이션의 발전(reverse engineering, forward simulation)’의 머릿글자를 따 REFS라 이름 붙인 컴퓨터 시스템의 개발에 18년을 투자했다. GNS는 대형 제약사 암젠의 벤처캐피털 부문 암젠 벤처스 Amgen Ventures, 바이오기업 셀진 Celgene 등 다양한 투자자들로부터 총 3,8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해 질병모델 구축 및 정밀화를 연구했다. 2017년 의학 학술지 랜싯 Lancet에 최초 게재된 일련의 시험에서, GNS는 REFS가 파킨슨병 류의 질병 치료에서 갖는 잠재력을 자세히 설명했다. 파킨슨병은 다면발현적 요소들로 인해 기존 치료제의 효과 편차가 큰 질환이다.

파킨슨병의 경우,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유발하는 상호작용들의 네트워크에 특정한 형태가 있다. 그리고 병의 진행 파악에 가장 믿을 만한 지표가 되는 증상은 운동신경 기능의 마비다. REFS에 입력한 파킨슨병 환자집단 및 통제집단의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GNS는 운동신경 저하에 따른 변화 과정을 구현하는 컴퓨터 모델을 100개 이상 생성했다. 이 모델들을 통해 신체기능 저하 속도의 증가에 기여할 수도 있는 유전자 변이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GNS는 이 결과를 활용해 서로 다른 무작위비교연구 5,000건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했다. 각 시뮬레이션은 다양한 치료법이 병의 진행 속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방식은 인간 대상 임상시험과 같은 결과를 내면서도, 빠르고 경제적으로 훨씬 우월하다. GNS는 다른 제약사와 제휴 관계를 맺고 당뇨·루게릭병·다발성 골수종·유방암 등 여러 병에 유사한 접근법을 도입하고 있다.

“우리에겐 이제 인간 환자와 환자가 보유한 질환을 컴퓨터에 구현·구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를 통해 약은 약별로, 치료관리 개선을 위한 개입활동은 활동 별로 시험해 어떤 환자에게 어떤 치료가 맞는지 찾아낼 수 있다.” GNS의 CEO 콜린 힐의 말이다.

이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상관관계를 찾는 것을 넘어, ’만약 그때 그랬었다면‘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환자 X에게 A약이 아니라 B약을 투여했다면 어땠을까? 과거를 재현해 다른 선택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AI를 활용하는 능력은 최근에 등장했다. 이 기술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는 상당 부분 UCLA의 컴퓨터과학 교수로 AI를 오래 연구한 주디아 펄 Judea Pearl의 공이라 할 수 있다. GNS의 기술 고문인 그는 지난 해 출간해 대중적 인기를 얻은 ’원인의 서(The Book of Why)‘에서 진정한 지능은 단순한 패턴 인지를 넘어선다고 설명했다. 머신러닝은 대규모로 패턴을 인지한 후 이에 기반해 어떤 일이 일어났을 수 있었을지, 과거의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사용법이 없는 데이터만으로는 의미 있는 지식을 찾을 수 없다. 펄은 “데이터는 인과 탐구에 근본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고 지적한다. 힐의 표현은 더 직설적이다. “딥(deep) 러닝이 그렇게 ’깊이‘있진 않다.”

올해 67세의 코엔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가 섞인 튀니지의 다문화적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두가 우아하고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 경험 덕분에 코엔은 “복잡한 게 아니라 복합적인” 것을 좋아하게 됐다. 9세 때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코엔은 이후 피아노 연주에 푹 빠졌다. 음악가보다는 과학자로서 더 큰 업적을 남길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고 의학으로 전향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런던 로열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차이코프스키 6번 교향곡을 지휘하는 것이 꿈이다. 그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CEO, 과학자가 되는 경향은 모두 똑 같은 유전자가 통제한다”고 농담했다.

코엔은 이전에도 유전체학과 기술을 바탕으로 제약계에서 성공한 바 있다. 그는 다발성 골수종 치료제인 벨케이드 Velcade 개발에 참여한 미국의 종양질환 치료제 개발사, 밀레니엄 제약(Millennium Pharmaceuticals)의 공동창업자다.

그는 파넥스트의 AI 연구가 성공하리라는 데 긍정적이지만, AI의 한계도 인지하고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는 인간의 과거 지식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서도 인간 바둑고수 여러 명을 꺾었다. 하지만 코엔은 바둑에는 일정한 수의 규칙이 있으며, 알파고는 이 규칙 전체를 완전히 숙지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생물학에서는 다면발현으로 인해 모든 규칙이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넥스트는 정교하게 디자인된 인공지능에 힘입어, 현재 알려진 규칙을 기반으로 모델을 구축하고 이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회사의 발견 모델은 현존 약물 1만 종 중에서 특허 기간이 만료됐고 ‘시장에서 판매되는’ 약 2,000종을 조합한다. 즉, 치료 효능이 있고 일반 판매가 가능할 만큼 안전하다고 판단된 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CMT 치료제 개발을 위해 파넥스트는 먼저 약 1년간 CMT의 네트워크 모델을 구축했다. GNS의 파킨슨병 지도와 유사한 이 모델은 CMT 관련 유전자 변이가 어떻게 ‘폭포’처럼 쏟아지는 신경 및 근육 문제로 이어지는지 보여 준다. 컴퓨터 모델은 이를 기반으로 ‘폭포’의 여러 단계에 대처하는 후보 약품 57종을 추렸다. 파넥스트는 이 57종을 대상으로 하나씩 시험관 실험을 진행해 22종으로 줄인 후 쥐 대상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가 인간 대상 임상시험에 사용된 3종 조합이다. 최근 나온 3상 임상시험 결과를 통해, PXT3003이 실제로 ‘폭포’의 여러 단계에서 작용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 총 3년이 걸렸다. 코엔은 파넥스트에 AI 모델이 없었다면 전임상 단계에 훨씬 더 긴 시간이 소요됐으리라고 본다. “(시작 시점에) 약품 2,000종의 가능한 모든 조합을 연구하면 수십억 개의 가능성이 있는데, 이 모두를 시험관 실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위양성 /*역주: 실제로는 음성인데 양성으로 나옴/ 결과와 막다른 골목이 등장하면서 수 년간 좌절이 이어졌을 것이다. AI가 이런 사태를 막았다.”

프랑스 파리증시에 상장된 파넥스트의 주가는 작년 10월 3상 임상 결과가 발표된 후 2배 이상 올랐다. 회사는 지난 10년간 연구개발에 약 1억 2,000만 유로(약 1,529억 원)을 투자했다. 제약업계의 기준으로는 크지 않은 금액이다. 파넥스트는 한 번도 흑자를 낸 적 없으나, 전문가들은 PXT3003이 시판될 경우 2020년을 기점으로 매출(2018년 900만 유로)이 치솟을 것이라고 추산한다(GNS 헬스케어는 현재 비상장기업이며 지출이나 매출을 공개하지 않는다).

파넥스트와 GNS가 보인 진전은 단순한 투자 성공 가능성을 넘어, AI의 성장과 이에 따르는 약리학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과를 추론하는 능력과 사실이 아닌 것을 가정하는 능력은 AI 사용자들이 오랫동안 원했던 목적지다. 두 회사의 컴퓨터 모델은 엄청나게 많은 변수를 관리·약화시킬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질병의 기본 정의조차도 진화할지 모른다. 최근 과학계가 깨닫고 있듯, 질병의 정의는 그간 지나치게 단순했다. 학술지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에 작년 실린 한 연구는 종양을 치료하려는 많은 시도가 그간 좌절된 이유를 암의 유전자 변이가 ’근본적으로 다양하다‘는 데서 찾았다. 특정 질병이나 질병군으로 묶였던 환자들의 증상에 사실 공통점은 적고 차이가 많았다는 것이다. 질병이 인간 몸 속 특정 유전자가 ’꺼졌느냐, 켜졌느냐‘에 따라 일련의 증상이 발현되는 구조가 아님이 명백해지면서, 제약사들은 복합성과 씨름하게 됐다. 기술이 이들을 도울 수 있다.

마지막이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AI기반 연구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희망을 제시한다. 신약 개발 비용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 현재, 알고리즘은 언젠가 의학계가 약품 연구에 이미 소요한 수조 달러에서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도울 만큼 똑똑해질지도 모른다. 코엔은 이론상 재목적화를 통해 “새 약을 설계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50개 약이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나의 감이다.” 그렇게 된다면 또 한 단어의 정의가 바뀔 것이다. 바로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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