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불가피한 추가 업무지시도 괴롭힘?…상사만 일하라는 건가"

[16일부터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주52시간 근무 도입도 버거운데

모호한 개념에 상당수 기업 혼란

불만 표출수단 악용 우려도 커져

녹취·증언 등 구체적 물증없으면

되레 문제 삼은 쪽만 난처해질수도

# 실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행원들의 성과를 점검하던 A 은행의 한 지점장은 고민에 빠졌다. 16일 시행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근거로 행원들이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지점장은 “다른 은행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환경을 고려하면 시시각각 성과를 따질 수밖에 없는데 위법행위가 될까 걱정”이라고 푸념했다.

# B 광고회사는 주 52시간 근로제에 괴롭힘 금지법까지 시행되면서 일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시달리고 있다. 일을 수주받아 처리하는 광고회사의 특성상 마감 시간과 업무량이 정해져 있는데 근무시간 외에 업무 지시를 하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를 당할까 하는 걱정에서다. 한 대기업 광고회사의 관계자는 “정말 불가피하게 추가 업무를 해야 할 때도 있는데 후배의 눈치를 보는 상사만 일하게 하는 법 같다”고 토로했다.





16일부터 시행되는 ‘괴롭힘 금지법’은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등의 행위를 금지한다. 근로자 5인 이상의 기업에 적용돼 괴롭힘이 확인되면 사업주는 가해자를 즉시 징계해야 한다. 양진호 위디스크 회장의 직원 폭행 사건 등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여파다.

이에 주요 대기업은 취업규칙을 개정하는 등 대비책 마련에 분주했다. 삼성전자는 괴롭힘 금지법을 취업규칙에 반영하고 지난달 임직원 대상 교육을 완료했다. LG전자는 지난 4월부터 각 사업장에서 조직 책임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고 대한항공은 인사포털 시스템 내에 접수처를 만들고 조사·조치 절차 등을 수립한 상태다. 대우건설과 현대건설은 법 시행 사실과 괴롭힘 주요 사례 등을 전 직원에 배포하고 ‘이의 없다’는 동의서를 받기도 했다.

국내 대표 기업들은 그나마 혼란에 대비했지만 상당수 기업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도 감지된다. 가장 큰 문제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기업 300개사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애로사항으로 ‘괴롭힘 행위에 대한 모호한 정의(45.5%)’를 꼽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규정이 모호한 만큼 법 시행 초기 인사·업무에 대한 불만의 표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사내에 크고 작은 부딪침이 많은데 대부분 법에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크다”면서 “시행 초기 담당 부서인 인사팀의 부담이 클 것”이라고 전했다. 건설사의 한 관계자도 “실제 시행됐을 때 어떤 돌발 상황이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걱정했다.

실제 직장인이 느끼는 괴롭힘의 유형은 광범위하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달 직장인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욕설·폭언·험담 등 노골적인 행위 외에도 △업무 전가(10.7%) △회식 참석 강요(7.7%) △근무시간 외 업무 지시(7.1%) 등을 ‘직장 내 괴롭힘 행위’로 꼽았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근로계약서에 명시돼 있지 않은 허드렛일을 시키는 경우도 괴롭힘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디자이너 브랜드의 소규모 작업실에서는 허드렛일이 허다해서 이를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중견 정보기술(IT) 기업에서 근무하는 김영훈(가명)씨는 “옆 부서의 팀장이 밤 11시 넘어서 카카오톡이나 전화로 우리 팀 업무가 아닌 일을 시키기도 하는데 법 시행 이후에 이 같은 요구가 없어질지 지켜보려고 한다”고 했다.



소규모 기업에서는 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대기업과 달리 취업규칙 개정·사내 홍보 등 사전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적용 대상인 5인 이상의 한 무역업체에 다니고 있는 최모씨는 “이런 법이 시행되는지조차 몰랐다”면서 “성희롱 예방 교육도 회사에서 1인 기업이라고 둘러대고 따로 교육하지 않는 것처럼 직장인 내 괴롭힘 금지법도 의무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녹취나 증언 같은 구체적인 물증이 없으면 오히려 문제 삼은 쪽만 일터에서 난처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제조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는 박지환(가명)씨는 “설령 상사가 법 위반 소지가 있는 언행을 했더라도 그 앞에서 스마트폰 녹음기를 켜는 등의 분명한 증거가 없으면 처벌하기 어렵지 않겠냐”면서 “동료들이 말과 행동을 목격했다고 한들 자기 밥줄이 걸린 일일지 모르는데 쉽게 나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 탓에 정부가 △모호한 규정들에 대한 정의(36.5%) △보다 많은 사례를 담은 사례집 발간(32.9%) △예방교육 프로그램 운영지원(26.6%) △TV 등을 통한 캠페인 및 홍보(26.6%) 등을 해야 한다는 기업의 요구가 많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관련 판례가 쌓이다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명확해지겠지만 법 시행 초기에는 기업들도 괴롭힘 행위를 보수적으로 넓게 판단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효정·이수민·김기혁·변수연기자 jpark@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