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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이 ‘장애등급제 폐지’를 ‘가짜’라고 부르는 이유

31년 만에 단계적 폐지된 장애등급제

장애인들 폐지 '가짜'라며 거리로 나와

장애인 단체 "예산 늘려야 등급제 폐지 취지 살릴 수 있어"

전문가 "예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담 인력 배치"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던 7월의 첫날. 서울역 방향 도로에는 수백 명의 장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가짜’라는 팻말이 들려있는 채였죠.

색다른 모습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애등급제를 폐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정부의 폐지 발표가 가짜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죠. 수요자의 혜택을 우선에 두고 정책을 펴겠다며 정부가 발표한 장애등급제 폐지안을 당사자인 장애인들이 나서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 그 이유가 몹시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도가 바뀌었다지만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을 체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이번 장애등급제 폐지의 주된 이유가 필요한 곳에 맞춤형 복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를 위해 6단계로 구분되던 등급을 없애고 장애 정도에 따라 중증과 경증으로 나누고 간소화했죠. 그동안 등급제의 틀 안에 갇혀 개개인의 상황에 따른 복지 혜택을 받지 못했던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등급을 매기는 ‘인정조사’ 대신 조사원이 장애인이 거주하는 곳을 직접 방문하는 ‘종합조사’를 실시해 개개인이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단체 측은 바뀐 제도에서도 ‘수요자’는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맞춤형 복지를 하려면 수요자가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또 아직도 기능제한에 대한 점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다리가 절단된 사람과 다리가 잘리지는 않았지만 걷지 못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의 차이가 큽니다. 시각장애인 자녀를 두고 있는 강미영(가명)씨는 “수요자 중심의 복지라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이 있어야 할 텐데 전혀 없다”며 “여전히 장애인들이 무엇을 못하는지에만 확인하는데 그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걸을 수는 있지만 걸을 때마다 통증이 너무 커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사람들도 아예 못 걷는 사람들과 비슷한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제대로’ 할 수 있는지를 묻는 문항은 없어 아쉽다”고 덧붙였습니다.



종합조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더 많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에 장애인들이 자신의 ‘무능력’을 스스로 입증하고 호소해야 하는 처지도 여전합니다. 오죽하면 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조사자가 오는 날이면 무조건 온종일 누워 있어야 한다”, “절대 말을 잘해서는 안 된다”는 자조 섞인 푸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조현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장애인들은 지역 공무원들이나 조사원들에게 자신이 뭔가 구걸하는 사람인 것처럼 호소해야만 하는 수치스런 상황에 힘들어했어요. 바뀐 제도 속에서도 여전히 그런 상황에 부닥쳐야 한다는 사실에 등급제 폐지가 가짜라고 얘기하는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장애인들은 바뀐 제도로 혜택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한자협)가 지난 5월 말부터 약 열흘 간 장애인 2,5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모의평가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34.4%(867명)의 서비스 시간이 현재보다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특히 똑같은 중증장애인이더라도 장애 특성에 따라 지원 시간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 걱정입니다. 일례로 시각과 청각을 평가하는 ‘시청각복합평가’ 총점은 36점이지만 근육장애 특성이 반영된 ‘누운 자세에서 자세 바꾸기’는 총점이 12점에 불과합니다. 근육장애 환자도 시각장애인만큼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중증 환자지만 오히려 지원이 줄어들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얘기죠. 최용기 한자협 대표도 한 간담회 자리에서 “(사지 마비 중증장애인인 본인도) 평가를 해보니 100시간 가까이 줄어들었어요. 저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지금 받고 있는 지원조차 부족해 일상생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만약 줄어들게 된다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어요”라며 비판하고 나섰죠.

복지부는 지금 지적되는 불합리한 지점들을 충실한 현장 조사를 통해 만회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권병기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장은 “조사 과정에서 장애인들이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조사원들 상대로 장애인 감수성 교육을 하는 등 내부 노력도 기울일 계획”이라며 “종합조사의 경우는 조사원이 문항 외에 가지고 있는 메뉴얼에 따라 지체·시각·청각 등 장애 특성이 점수에 잘 반영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시행 3개월 안에 제도개선위원회를 열어 장애인들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복지 전담 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의 노력이 어디까지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현재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해 시군구 및 읍면동 주민센터에 추가로 배치되는 장애인 복지 전담 인력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김동기 목원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등급제 폐지의 핵심 역할은 주민센터에 있습니다. 주민센터에 있는 공무원 중심으로 장애인 서비스 연계가 이뤄지는데 장애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인력이 대부분이에요. 추가 인력 배치가 이뤄져야 장애인들이 제대로 된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고 체감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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