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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워치] 디즈니 킹덤 '꿈·생쥐 한 마리'로 시작됐다

■글로벌 콘텐츠 주무르는 디즈니 왕국

월트 디즈니, 형과 1923년 만화사 창업

잇단 실패 끝 '미키마우스' 캐릭터 탄생

1950년대 TV시대 맞아 안방극장 점령

영화·방송서 해외12곳 테마파크 진출도

시총 2,500억弗...세계 최고 엔터 회사로

월트 디즈니




“내 모든 것은 ‘꿈과 생쥐 한 마리’로 시작했다.”

세계 최대 콘텐츠·미디어 기업인 월트디즈니사의 창업자 월트 디즈니는 지난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첫 디즈니랜드를 개장하면서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디즈니사가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자 엔터테인먼트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했던 그 당시만 해도 미키마우스가 아이언맨과 헐크, 스파이더맨을 호령하고 스타워즈·라이온킹·겨울왕국을 지배하는 거대 제국으로 성장할 줄은 창업자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출발한 디즈니는 전 세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받는 캐릭터들뿐 아니라 미국 3대 지상파 중 하나인 ABC방송, 세계 스포츠 이벤트를 쥐락펴락하는 ESPN, 21세기폭스 영화·방송을 거느린 거대 미디어 왕국으로 우뚝 서 있다. 미국을 필두로 유럽·일본·중국에 진출한 12곳의 디즈니랜드 테마파크는 매일 수만명의 입장객을 끌어들이며 ‘아메리칸 드림’의 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다.

창업자인 디즈니 사후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디즈니사는 마이클 아이스너 전 회장과 로버트 아이거 현 회장 등 강한 추진력과 탁월한 통찰력을 겸비한 경영의 대가들이 창업자의 비전에 끊임없이 혁신을 더하면서 지금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창업 100년을 4년 앞둔 지금 디즈니는 시가총액 2,500억달러를 넘나드는 자타 공인 세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왕좌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월트 디즈니가 여덟 살 많은 형 로이 디즈니와 애니메이션 회사 ‘디즈니브러더스스튜디오’를 설립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 두 살에 불과했다. 고향인 시카고를 떠나 캔자스시티에서 두 번이나 창업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그는 영화 산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서 새 꿈을 펼쳤다. 대중의 심리를 잘 읽는 디즈니가 친구 어브 아이웍스의 미술 실력, 형의 경영 능력을 합쳐 만든 첫 히트 캐릭터 ‘토끼 오스왈드’는 회사를 성공 가도에 올려놓는 듯했으나 직원의 배신과 배급사의 횡포로 저작권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디즈니는 형의 동의 아래 회사 이름을 ‘월트디즈니’로 바꾼 후 독립적 애니메이션 제작에 집중해 마침내 90여년간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될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미키마우스 시리즈물은 큰 인기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뉴욕의 갑부 조지 보그펠트가 미키마우스 저작권을 빌려 만든 캐릭터 상품으로 큰돈을 버는 것을 본 디즈니가 본격적인 판권 계약에 나서면서 디즈니 캐릭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디즈니는 1934년 한 해에만 3,000만달러 이상의 저작권 수입을 올리며 애니메이션을 명실공히 산업으로 끌어올리는 선구자가 됐다.

디즈니사의 본격적인 성장은 1950년대 TV 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가정에 TV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디즈니는 25년 넘게 축적해온 애니메이션 콘텐츠와 캐릭터들을 담은 TV 프로그램 ‘디즈니랜드’로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어 1955년에는 영화와 TV 속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테마파크 디즈니랜드를 처음으로 선보여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아이들의 ‘이상향’으로 자리매김한 디즈니랜드 개장을 시작으로 ‘원 소스 멀티 유즈(1차 콘텐츠의 다양한 활용)’ 전략에 날개를 단 디즈니는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로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잘나가던 디즈니사는 창업자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면서 위기를 맞았다. 월트 디즈니가 1966년 폐암으로 사망한 데 이어 디즈니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형 로이 디즈니마저 1971년 올랜도의 황무지에 세계 최대 규모의 테마파크인 디즈니월드를 건설한 후 유명을 달리하자 디즈니는 1970년대 후반 시장점유율이 4%까지 추락하며 꼴찌 영화사로 전락했다.

몰락한 ‘매직 킹텀’의 부활을 이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인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사장을 지냈던 아이스너다. 1984년 아이스너를 최고경영자(CEO)로 맞이한 디즈니는 이후 화려하게 비상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이스너 회장은 디즈니의 최대 무기인 창조력을 일깨우고 인재를 충원해 ‘인어공주’와 ‘알라딘’ ‘라이온킹’ ‘미녀와 야수’ 등 1990년대를 수놓은 흥행 대작들을 잇따라 선보였다. 또 그는 1993년 영화사 미라맥스를 인수해 할리우드 지배력을 강화한 데 이어 1995년에는 지상파인 ABC방송을, 이듬해에는 스포츠 케이블의 최강자 ESPN까지 사들여 명실공히 미디어 왕국을 일궜다.

이후 22년간 이어진 아이스너의 장기집권은 경영 전횡으로 이어지며 회사에 또 다른 위기를 몰고 왔다. 결국 공동 창업자 로이 디즈니의 아들인 로이 에드워드 디즈니 전 이사 등이 나서 아이스너를 축출하고 2005년 ABC방송 출신인 로버트 밥 아이거를 새 CEO로 선임했다. 겸손함과 자유분방함을 겸비한 아이거 CEO는 2006년 픽사, 2009년 마블스튜디오, 2012년 루카스필름 등을 인수하면서 디즈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탄생한 ‘토이스토리’ ‘어벤져스’ 등의 시리즈는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올 초 라이벌인 21세기폭스의 영화 및 일부 방송 사업까지 인수한 디즈니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아이거 회장은 내년에 ‘겨울왕국2’와 2021년 ‘아바타2’를 개봉해 디즈니 영화의 성공신화를 이어가는 한편 11월에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디즈니플러스’를 출범시켜 콘텐츠 공룡으로 성장한 넷플릭스의 도전을 뿌리친다는 계획이다.

아이거 회장은 “스토리텔링의 강력한 힘을 믿으라는 창업자의 유지를 잊지 않고 있다”며 “디즈니를 창의적 마인드와 혁신적 기술 위에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존속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손철기자 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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