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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57년 '리틀록 위기'

연방군 투입해 흑인학생 보호





1957년 9월23일 자정,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연방군 투입!’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미 육군 제101 공수사단 병력 1,000명이 아칸소주 리틀록시에 깔렸다. 미군에서도 즉응 전력과 출동 준비가 가장 뛰어난 부대답게 병사들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공권력 발동의 모범 사례로도 기록되는 ‘리틀록 위기’의 발단은 1954년의 연방 대법원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 집 앞 학교를 놔두고 철길을 건너 1.6㎞가 넘는 학교로 어린 딸을 보내야만 했던 흑인 목사 올리버 브라운이 제기한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세기의 판결을 내렸다.

시설이 백인학교와 같더라도 인종을 구분해 교육하는 자체가 차별이라는 판결은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1896년의 연방대법 판결(플레시 대 퍼그슨 사건)도 뒤집었다. 얼 워렌 대법원장은 인종 분리정책을 취하고 있는 남부의 주 정부들에 대해 공립학교 통합 명령도 내렸다. 당장 반발이 따랐다. 백인 우월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인 아칸소주의 주도(州都) 리틀시의 고교(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가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나섰다. 전미유색인종협회가 이에 맞서 우수학생 9명을 뽑아 진학시키자 사달이 벌어졌다.



백인들이 무리를 이뤄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힘으로 막았다. 15세 고교생 엘리자베스 엑포드의 회고. “등굣길에 군중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죽여라, 죽여’라는 외침 속에 도와줄 만한 사람을 애타게 찾던 순간 인자한 얼굴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침을 뱉었다.” 주지사 오발 포버스는 한술 더 떴다. 흑인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주방위군까지 동원해 등교를 막아버렸다. 결국 여론이 들끓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01 공수단을 투입하는 동시에 아칸소 주방위군을 연방군에 편입, 주지사의 저항 수단을 무력화시켰다.

군은 백인 군중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흑인 학생들에 대한 위협을 철저하게 막았다. 교내 차별과 모욕에도 9명의 학생(리틀록 9)들은 꿋꿋하게 버텼다. 군은 백인 군중들이 포기할 때까지 학생들을 지켰다. 70대 후반에 접어든 ‘리틀록 9’은 요즘 흑인민권운동의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정의와 자유 편에 선 언론과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보다 다가섰다. 62년 전 미국의 리틀록 위기에서 한국을 읽는다. 배타적 기득권을 옹호하는 언론 환경 속에서 한국이 ‘평등하되 분리된 사회’로 변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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