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목 시세보기

서울경제

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오색인문학]'과거의 상상' 로봇이 '노동자의 미래'로

■학교서 배우지 않은 문학 이야기
- 박영희 번역 ‘인조 노동자’ (1925)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과
1920년 체코 희곡서 탄생한 '로봇'
영혼·감정없는 무임노동자로 진화
박영희 1925년 '인조노동자'로 번역
해방과 희망 꿈꾸는 로봇의 반란에
이민족에 착취당하는 식민지인 투영
일제 검열도 피해 무사히 연재 성공

로봇(robot)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청소기부터 의료용까지 가까이에서 로봇을 접할 수 있는 시대다. ‘로보트 태권브이’라면 반세기 전 추억이고, 인공지능(AI)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벌써 낡은 개념이 된 로봇을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어떻게 불러야 어울릴까.

해양생물학자 로숨이 10년 연구 끝에 제조에 성공한 뒤 그의 아들은 외딴섬에 공장을 세워 가장 훌륭한 노동자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 이름은 RUR, 즉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다. 그 회사가 지향하는 훌륭한 노동자란 가장 값싼 노동자이자 욕구가 가장 적은 노동자를 가리킨다.

[오색인문학]'과거의 상상' 로봇이 '노동자의 미래'로
1920년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창작한 희곡 ‘RUR’ 초판. 여기서 등장한 로봇의 이름이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다.

로봇은 그렇게 탄생했다. 1920년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창작한 희곡에서다. 작품 제목도 회사 이름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그대로다. 모든 공상과학소설(SF)의 원천이 된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950년께다. 그때쯤이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아이, 로봇’이 나오고, 실제로 산업용 로봇이 등장했다. 로봇은 빠르게 사이보그·안드로이드·휴머노이드·클론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상상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오색인문학]'과거의 상상' 로봇이 '노동자의 미래'로
1921년 최초 상연에서 로봇 역을 맞은 배우

로봇이라는 말은 노예나 강제노역을 뜻하는 보헤미아어 ‘로보타’에서 따왔다. 영혼이 없고 감정이 없는 로봇의 가장 큰 미덕은 무임노동자라는 점이다. 차페크가 창조한 로봇을 일본에서는 인조인간, 중국에서는 기계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말뜻으로 보나 원작의 주제로 보나 가장 정확한 번역이다.

기묘한 구석은 또 있다. 이야기는 로봇의 해방을 주창하는 헬레나가 외딴섬을 방문하면서 비롯된다. 그는 로봇이 인간과 똑같이 임금을 받고 투표도 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저항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미모의 헬레나에게 한눈에 반한 사장은 억지 청혼 끝에 그와 결혼한다. 겁탈하다시피 헬레나를 섬에 주저앉힌 사장은 로봇의 주군이자 노동자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여성의 주인이자 지배자이기도 한 셈이다.

사장과 헬레나의 결혼생활 10년. 만국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겠지만 더 이상 일 자체가 필요 없는 유토피아는 과연 도래할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하인이나 노동자로 태어난 로봇이 살육하고 정복하는 노동자, 즉 군인으로 자라는 것은 시간문제다. 헬레나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인류의 생식도 멈췄다. 헬레나는 로숨의 로봇 제조비법을 불태워버린다.

어느새 감정과 욕구를 갖게 된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고 혁명의 밤이 닥친다. 멸종된 인류를 대신해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인간에 의한 로봇 생산도 당연히 중단됐다. 그러나 인간 헬레나를 본뜬 로봇 헬레나가 다른 로봇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새로운 종의 기원이 열린다. 생명의 역사에 대한 다시 쓰기가 로봇 헬레나에서 비롯되는 장면이다.

[오색인문학]'과거의 상상' 로봇이 '노동자의 미래'로
1925년 발간된 박영희 번역 ‘인조노동자’

로봇의 본질이 인조노동자이자 무임노동자라는 점을 날카롭게 꿰뚫어본 번역가는 박영희다. 한때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박영희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RP·카프)이 결성된 1925년 ‘인조노동자’ 번역에 나서며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이론가이자 지도자로 떠올랐다. 왜 하필 로봇이었을까.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 유럽의 연극무대 곳곳을 누빈 인기 레퍼토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자나 인권 문제를 그렸지만, 그렇다고 진보주의 문예의 대표작도 분명 아니다. SF의 효시라는 점을 일찌감치 알아봤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두이기도 하다.

박영희에게 로봇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뿐 아니라 이민족의 압제에 신음하는 식민지인이었다. 또 남성주의적 야만성에 짓밟힌 여성이며, 광기에 가득 찬 전쟁에 시달리는 약자이기도 했다. 억압과 지배에 맞서 감히 임금과 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로봇, 약탈과 파멸에 저항해 자기 욕망과 주체성을 부르짖을 수 있는 로봇. ‘인조노동자’는 반란과 혁명의 성공을 예언하고 또 다른 창세기를 꿈꿀 수 있는 해방과 희망의 언어일지 모른다.

당시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로봇의 승리 덕분인지 ‘인조노동자’는 일제의 검열을 피해 무사히 연재될 수 있었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 이름 없는 기계들의 항거와 독립 의지, 인종과 계급과 성별을 뛰어넘는 연대의 상상력은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여주인공 헬레나를 죽이고 로봇 헬레나에게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무임노동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마저 철저히 부정했다. 새로운 세계의 신흥세력에는 오직 과감한 실천과 투쟁이 있을진저.

다만 박영희는 엉뚱한 오역을 저질렀다. 로봇의 전면적인 항전이 일어난 날은 헬레나가 처음 외딴섬을 방문한 지 10년째 되는 기념일이다. 그 시간은 시종일관 5년으로 번역됐다. 박영희는 혁명의 날을 간절히 앞당기고 싶어 했다.

[오색인문학]'과거의 상상' 로봇이 '노동자의 미래'로
박진영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XC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이메일 보내기

보내는 사람

수신 메일 주소

※ 여러명에게 보낼 경우 ‘,’로 구분하세요

메일 제목

전송 취소

메일이 정상적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닫기